'명상'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08.03.11 주의력을 한 곳에 집중하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2. 2008.03.11 명상은 자아를 깨닫고 내면의 기쁨을 얻는 것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3. 2008.03.11 아침에 명상하는 것이 좋다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4. 2008.02.15 뉴 에이지 넌센스(New Age Nonsense)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5. 2007.12.21 회전명상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6. 2007.12.21 달리기 명상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7. 2007.12.21 기도명상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8. 2007.12.17 지하철 명상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9. 2007.12.17 웃음 명상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10. 2007.12.17 황금빛 명상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돋보기를 사용해 햇빛을 한 점에 모으면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햇빛이 아무리 풍부해도 한데 모으지 않으면 그 빛을 활용할 수 없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원기(생명력)도 우리 몸 전체에, 심지어는 신체 외부에까지 분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에 주의를 기울일 때 힘이 그리로 분산됩니다. 원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주의력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장애를 태우는 불길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매우 논리적이어서 신비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수행에 관해 미신적이어선 안 됩니다. 관음법문을 왜 수행하는지,(지혜안을 가리키시며) 이곳에 왜 집중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십시오. 우리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땐 이마를 찡그리며 이곳에 집중하지 않습니까? 우린 집중하려 할 때 눈살을 찌푸립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죠.

그러므로 밖으로 주의력이 분산되어 원기가 새어나가거나 낭비되지 않게 하려면 이 지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집중할 때 힘이 더 커지지 않습니까? 더 빠르게 장애를 돌파할 수 있지 않나요? 예, 그렇습니다!

한 손으로는 단지 문을 열 수 있을 뿐이지만 양손으로는 원한다면 문을 부술 수도 있는 이치입니다. 이는 매우 논리적이고 간단한 이치여서 전혀 미신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내게 동의하지 않고, "외부사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우리의 원기가 흩어진단 말입니까?" 하고 공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기가 밖으로 분산되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최면술사들이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힘 (에너지)을 내보내 다른 사람을 통제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자유자재로 물건을 공중에 띄우거나 떨어뜨릴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는 먼 곳에서 사념으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티베트나 중국 같은 곳엔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집중된 생각은 매우 강력합니다.

그러니 주의력이 분산될 때 원기가 낭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를 낭비하는 겁니다. 어떤 일을 완벽하게 하려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연주를 하든 세탁을 하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빨래를 할 때도 우선 얼룩을 찬찬히 살펴보고 어떻게 빨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예술가들도 훌륭한 걸작을 탄생시키려면 속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나 여자를 쳐다볼 때가 있는데 그 때 자신의 힘이 소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뭔가를 감지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여러분에게 매혹될 수도 있죠. 바로 여러분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그를 끄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힘이 방출되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원기에 집중해서 힘이 낭비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절약해야 하는 것이죠. 돈을 절약하듯이 말입니다. 만일 불필요한 곳에 흥청망청 돈을 쓴다면 절대 큰돈을 모을 수 없습니다. 돈을 아껴 써서 1달러를 절약하면 1달러를 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저축이 늘면 생활이 좀더 나아지고 그토록 힘들게 일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돈이 모이면 우리에게 요긴한 물건을 쉽게 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하찮은 물건조차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축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뭐든 살 수 있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매일 외부세계로 우리의 에너지가 분산되므로 명상을 통해 그만큼을 보충해야 합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저축하는 것이죠. 그러면 아무 것도 없는 것 보단 낫습니다. 우리는 24시간 가운데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두 시간 반을 다로 떼어서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원기를 보충하는데 써야 합니다.

돈을 쓸 시간이 있으면 돈을 버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우린 하루 동안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8시간을 일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두 시간 반을 아껴 명상하는 것은 24시간 동안 쓸 것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아주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사실 나는 두 시간 반이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입문으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집에 돌아간 뒤에도 계속 일을 해야 합니다. 입문은 공장에 취직한 것과 같습니다.

고용주가 여러분을 채용했다고 매달 자동적으로 여러분에게 월급이 나오는 건 아니죠. 매일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고용주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할 때 일한 만큼의 보수가 주어집니다.

지혜와 힘을 얻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명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을 많이 보게 될 겁니다. 이건 신통이나 축복의 결과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축적한 힘의 결과죠. 그렇게 되면 전에는 해결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주 논리적이죠!

이전에 우리는 부유했지만 쓸데없는 물건을 마구 사들여 돈을 많이 낭비했습니다. 물건을 너무 많이 사들였기 때문에 집에 물건을 재어둘 공간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차로 그것들이 골치 아픈 짐이 됐죠.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끌어 모으는 바람에 거주할 공간이 협소해지고 많이 번거롭고 불편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 모든 물건들을 처분하고 더는 바보같이 마구잡이로 사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겐 넓은 공간이 있고 많은 저축이 있습니다. 그러면 훗날 우리 취향에 딱 맞는 아름답고 편리하고 긴요한 물건을 발견했을 때 저축한 돈으로 그것을 살수 있을 겁니다.

그 물건이 너무 좋아서 그것을 살 때 아주 기분이 좋을 겁니다. 돈이 아주 유용하게 쓰였고 물건이 썩 좋아서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겠죠. ‘어째서 이전에는 이것을 살 수 없었을까?’ 어쩌면 그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 자신의 돈으로 산 겁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저축했기 때문에 이처럼 값진 물건을 살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전에 어리석게 돈을 낭비할 때는 그처럼 값진 물건은 쳐다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외부의 사물을 바라보는데 자신의 원기와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모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위안과 안락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실제로는 실망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물건을 구입하면 집안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해지고 자기 자신을 위한 공간마저 없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 막히고 옥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전에 우리는 업장이나 장애, 인과 등 스스로 처리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자신이 축적한 막대한 힘으로 그런 업장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업장을 줄여 스스로 좀더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진보할수록 삶이 더욱 편안해지죠.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선 정말로 신실하게 온 마음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신실할 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실하지 않으면 점점 게을러져서 어쩌다 한번씩 수행하거나 아예 수행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건 매우 논리적인 얘깁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세속적인 일을 예로 들어보죠.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어떤 난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집이 아무리 멀더라고 그를 보러 갈 것이고, 그의 성질이 어떻든 다 받아줄 것입니다. 그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감수하겠죠.

반면에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신실하지 않다면 그를 봐도 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고 아무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그와 결혼하거나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를 그리워하거나 그를 보러 가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니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당연히 그를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다른 누구나 다른 뭔가를 원하겠지요. 유가나 오락거리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를 얻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 그 역시도 여러분에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신실하지 않아서 그를 사로잡거나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는 우리 자신의 지혜와 놀라운 능력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진실로 지혜와 능력을 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것을 얻기 위해 분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얻지 않겠지요.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습니까?(논리적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그것을 원할 때에만 그것을 얻기 위해 집중합니다. 원치 않는다면 그것이 오든 말든 관심을 두지 않죠. 그러므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한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여러분이 명상한다는 사실을 숨기라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칭하이무상사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사실 행복할 때는 명상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도 명상하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양자간에 균형을 지키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이 내면에 있음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양극단을 느끼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든, 또는 누군가가 우리를 매우 사랑하더라도 때로 그들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면 상처받지요. 우리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상처가 됩니다.

심지어 자녀나 남편의 경우에도 그들이 우리를 정말 사랑해 주길 원한다면 우리는 노예처럼 24시간 내내 그들의 온갖 요구를 들어 줘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행복해하며 우리 곁에 붙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에 불과합니다.

때로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모를 오해하거나, 혹은 부모가 항상 함께 있어 주고, 부모의 시간을 전부 자기들에게 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부모에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신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부모에게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론 부모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선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 혹은 지극히 정상적인 기대 때문에도 괴로움이 생깁니다. 사람을 만족시키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늘 누군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내일도 그가 똑같이, 혹은 더 많이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내일은 무슨 일이 생겨 그가 괴팍스러워지거나 우울해져서 여러분과 말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의 잘못이 아닐 텐데도 여러분은 "당신이 내게 관심이 없는데 내가 왜 당신에게 관심을 둬야 해?" 하고 말합니다. 양쪽 모두 그렇게 얘기하면 서로 헤어지게 되거나 최소한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다시 화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어쩌면 영영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헤어지고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 일들로 상처를 받지 않는 게 아닙니다.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상처를 받기 마련이지요.

사실 우리가 내면의 행복에 진실로 의존한다면 모든 것이 갖춰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실망하거나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누가 와도 괜찮고 오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내면은 상처받거나 고통 받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고통이나 슬픔, 불행은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무지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그리고는 실망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유일한 근원은 내면에 있습니다. 우리는 명상할 때마다 그 근원에 닿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여러분은 항상 모두의 내면에 있는 기쁨의 중심에 도달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스승의 힘이 있는 곳, 우주의 모든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며, 사랑과 자비의 산실로서 사랑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진선미가 그곳에 잠재되어 있으며 여러분이 발견해 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조만간에 죽을 텐데, 어디로 갈지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하며 즐겁게 삶을 이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존엄성에 걸맞습니다. 우리는 이 물질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온 우주에서 최고의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우리가 최고의 창조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하며 모든 것을 두려워하거나 어리석고 비참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가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내면의 보물을 갖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이것이 명상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즉 여러분 자신을 알고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목적이지, 스승이 그렇게 말했고 여러분이 스승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스승의 말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여러분에게 이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명상이 여러분을 위한 것이지, 스승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스승은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명상하고 싶지 않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건 여러분의 삶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통제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누군가를 통제하려 한다면, 여러분은 그에게 얽매여야 합니다. 경찰이 범인을 지키기 위해 서로 수갑을 채우듯이 말입니다.

나는 그러한 지위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 여러분에게 이로운 것이며, 만약 여러분이 들었을 때 그게 논리적이고 또 이해된다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내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명예이고 특전이며, 그러한 비밀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생애 최고의 행운입니다. 그것은 강제적인 것도 아니고 흥정거리, 의무도 아닙니다. 이렇게 쉽게 모든 고통에서 해탈시켜 줄 문을 만난 건 수천 수백만 생에서 최고의 특전이며, 최고의 행운입니다. 그러니 계속해 나가십시오. 그러기만 하면 됩니다. (대중 박수)

때로 늦게까지, 밤 12시, 새벽 1, 2시까지 일을 할 때도 나는 자기 전에 명상을 합니다. 나는 항상 나의 모든 책임과 의무를 벗어 두고 명상하고 싶습니다. 나는 결코 명상을 해선 안 된다거나 명상이 괴롭다고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한번도요! 그것은 기쁨이고 휴식의 근원이며, 육체적으로 봐서도 힘을 재충전시킬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

성불(成佛) 같은 것을 운운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를 명상하지 않는다면, 그날의 피곤함과 사회의 온갖 부정적인 폭격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쳤다거나 이런저런 일이 생겼다고 내게 불평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명상을 충분히 하지 않았으니 그런 겁니다. 그러니 그건 여러분이 치러야 할 몫입니다.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안정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명상을 하면 할수록 이것이 유일한 법문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은 어느 누군가가 백만 달러를 주면서 스승이나 명상을 바꾸라고 해도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수승함을 알고 있고 거짓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이것이 자신을 위한 법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의 명상이 형편없어도 그것이 전적으로 자기 잘못이라는 것을 알지요. (스승님과 대중 웃음)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해 보면, 관음법문이 유일한 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관음법문은 모든 것의 종지부이며, 뭐라 더 논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렇긴 하지만…" 할 것도 없이 확실히 이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느낌이며, 우리가 분명히 아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 느낌을 안다면 그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내가 말할 필요도 없지요.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나는 아침에 명상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내면의 체험과 빛을 보기 매우 쉬운데, 그건 충분히 잠을 잔 뒤라서 상대적으로 정신이 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잠을 잤으되 잠기운이 약간 남아 있을 때, 이 시간이 명상하기엔 가장 좋은 때입니다. 물론 이때는 마치 음식을 먹을 때 완전히 배부르진 않고 좀더 먹고 싶을 때처럼 일어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명상하기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밤에 쉬고 나면 많은 어려움과 장애, 업장이 씻겨 나갑니다. 전날 받았던 느낌과 부정적인 영향들이 모두 씻겨 나가고 잊혀집니다! 모든 인과들이 꿈속에서 갚아져 아침에 일어날 때 개운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명상할 때 빛을 보기가 쉽고 우리 내면의 최고의 품성과 교류하기도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밤에 일하고 낮에 잠을 자기도 하므로, 각자의 상황에 따라 잠을 자고 일어나서 명상하십시오. 만약 7시에 일어날 수 없다면 9시에 일어나세요. 그래도 얼마 동안은 명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보게 됩니다. 쉽게 다른 사람들의 업장에 오염되고 끌어내려져 순식간에 수준이 떨어지게 되지요.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진보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기분이 즐겁지 않거나 어떤 일이든 그다지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화나게 하면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또 일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칭하이무상사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뉴 에이지 넌센스(New Age Nonsense)]

 

 

 

비텐(Veeten)에 의한 서론




뉴에이지 운동은 기묘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뒤쳐진 것들이 한데 휘져어진, 맛좋고 유쾌하게 뒤섞인


이상한 혼합물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너무나 푹 뒤섞여서 삶아진 나머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왕겨 더미에서 영원한 씨앗을 골라내 보겠다는


모든 희망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적인 혼란이며 디즈니랜드적인 허황된 영성(靈性)이 지닌 유독성 망상(妄想)을 널리 퍼뜨리고 있다.




왜냐 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캘리포니아인(人) 영매(靈媒)들은 플레이아데스 성단(星團)으로부터 온,


육체와 분리된 깨달은 존재들이 일본의 주부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영혼의 짝(soulmate)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 주도록 허락하고 있으며, 한편 독일인 선사(禪師)들은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파도 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주말 과정 깨달음 증명서를 발급해 주고 있고, 영국의 사업가들은 그들의 애완견인 치와와의 ‘더 높은 자아(Higher Self)’와


접촉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全) 지구적이 되어 버린 뉴 에이지 운동이 지닌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그 운동이 진실, 지복(至福), 그리고 의식


즉,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서 정신만 혼란케 만드는 돈과 권력과 명성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인류의 집단적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점차 커져 가고 있는 강한 충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 에이지 운동이 지닌 우스꽝스러운 점은, 그 운동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정작 찾아야 할 곳은 빼 놓은 채로,


온갖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동이 지닌 위험한 점은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 뒤섞인 거짓말, 어설픈 진리 그리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영적인 꿈


같은 것들을 명상의 기술에 관하여 이야기한답시고, 그럴듯하게 위장한 채 수백만의 순진한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뉴 에이지 속에 깃든 자기 기만의 양(量)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 심장부에 깨달은 의식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명상의 권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뉴 에이지 서적을 8권에서 10권 정도 읽었고, 캘리포니아에서


영매들을 몇 사람 방문했으며, ‘당신의 오라를 보라(See Your Aura)’라는 주말 세미나에 참석했었고, 진짜 아틀란티스제(製)


수정 몇 개를 구입하였으며, 명상에 관한 뉴 에이지 베스트 셀러를 한 권 더 쓰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지가 무지를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소위 말하는 내적인 지식은, 진지하기는 하지만 거짓에 현혹될 가능성도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다가


마침내 그 지혜의 열매는 겉에다 설탕을 바른 영적인 패스트 푸드가 되어 결국 당신을 더욱 깊이 더욱 얼키고 설킨 꿈들 속으로


인도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뉴 에이지가 하나의 농담이라는 것도 사실인 반면, 동시에 위험한 농담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적인 어설픈 진리들 가운데 몇 가지를 명확히 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오쇼 타임즈는


뉴 에이지 운동에 사용되는 세미나 서적들 가운데 하나이며,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의 베스트 셀러인


‘내면으로 들어가기 - 내적인 변형을 위한 안내서(Going Within - A Guide for Inner Transformation)’라는 책에 언급된


뉴 에이지의 핵심적인 오해들 몇 가지를 선별적으로 싣고 있다.


이렇게 셜리 맥클레인의 저서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그녀가 유별나게 재능 있는 배우이며, 무용가인데다


자유로운 정신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그녀가 소유한 명상이라는 내면의 과학에 관해 직접적인 지식이란 것이


대부분, 3류 영매들로부터 끌어 모은 비의적이지만 무의미한 지식들과 깨달은 스승들로부터 가져온 진리 몇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비의적인 지식 그리고 명상에 관한 단편적인 것들, 서로 반대되는 여러 가지 전통들로부터의 지침들


몇 가지를 끌어 모아 한데 붙여서는 ‘새롭고 개선된 것’이라고 포장해서 내놓으려고 하는, 많은 뉴에이지 스승(guru)들의 교활한


음모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카(Arica), 집단 감수성 훈련(EST), 그리고 싸이언톨로지*


모두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대상으로, 더 잘 그리고 더 빨리 팔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은 욕심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고대의 명상적 전통들을 한데 섞어 억지로 짜 맞추려는 이러한 위험한 일시적인 유행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잠재적으로 팔고 있는 것은 광기에 이르는 느린 과정일 뿐이다.


싸이언톨로지(Scientology): 미국의 공상 과학 소설가인 라파이에뜨 로날드(Lafayette Ronald)에 의해 창시된 교파로,


1950년대에 베스트 셀러였던 그의 책 'Dianetics-The Modern Science of Mental Health'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명상은 기법이 아니다.




예를 들면, ‘내면으로 들어가기(Going Within)’ 에서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은


조절이 되어진 요가 호흡법(“10초를 세는 동안에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10초를 세는 동안에 숨을 내쉬는 법을 배워라.”)


으로 시작해서, 긍정적인 만트라(“나는 마음 속으로 ‘나는 빛 속에 있는 신이다(I am God in Light)’라고 되뇌인다.”)를 외고,


요가의 여러 자세들 그리고 마음을 강제로 고요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의 작은 물체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일 명상 한 가지를 추천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미묘한 마음을 계발하고 싶어하는 뉴 에이지 지지자들에게는 대단한 것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오쇼에 따르면, 그것은 명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반복해서 강도 있게 이루어질 경우, ‘명상’을 위한 그와 같은 선의의 처방은 심리학적으로 유해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명상은 불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데, 거기에 서로 대치되는 명상 기법들을 섞는다는 것은,


그 불이 심리적 다이나마이트가 되도록 기름을 붓는 것이다.

 

 

 

“아리카(Arica)의 방법은 사랑이 없는 과학 기술(techology), 기법, 지식이다 - 그런 까닭에 거기엔 사람들을 로봇으로 바꾸어

 

버릴 위험이 있다.” 라고 오쇼는 ‘사랑의 길 (The Path of Love, #2)’ 에서 말하고 있다.




“아리카의 방법들은 서로 다른 여러 학파 즉, 수피(Sufi), 구제프(Gurjieff), 티벳, 인도, 일본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그것은 절충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그들은 기법들을 선택했다.


먼저, 그 기법들은 서로 다른 여러 학파에서 선택된다.


그 기법들 안에는 하나의 조화도 없으며, 그 기법들 안에는 중심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쌓아올려진 물건과 같다 - 한 무리의 사람들, 하나의 군중과 같으며 하나의 가족이 아니다


- 왜냐 하면 그 기법들서로 다른 학파들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수피의 기법은 선의 기법과 다르기 마련이다.


둘 다 기능을 하고, 둘 다 작동을 하지만, 그것은 그들 자체의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그 기법들은 그 체계 밖에서는 작동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한 대의 차에서 부품 하나를 꺼내서 다른 구조를 지닌 다른 차에다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작동하지 않고, 그대는 당황한다. ‘어째서 이 차가 작동하지 않는 거지?’


첫 번째 차에서는 작동을 했었다. 거기에는 하나의 조화가 있었다. 그 부품은 그 차를 위한 것이었다.


선(禪)의 방법은 선 철학 안에서 작용한다.


수피의 방법은 수피 철학 안에서 작용한다.


티벳의 방법은 비술적이고 비의적인 티벳 불교 안에서 작용한다.


요가의 방법은 파탄잘리 체계 안에서 작용한다.


그대는 그러한 방법들을 아무 곳에서나 선택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롤스 로이스에서 몇 개, 링컨에서 몇 개, 캐딜락에서 몇 개, 그리고 피아트에서 나온 몇 개의 부품들을

 

가지고, 차 한 대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해서 온갖 곳에서 나온 부품들을 가지고 뒤범벅을 만든다.


그대의 차가 위험하다.




“아리카는 서로 다른 학파들에서 선택해 왔다.


아리카는 매우 탐욕적이고, 절충적이다.


하지만 거기에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의 소음이다.




첫째로, 만약 그대가 아리카의 방법을 지나치게 따르면,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 주변에서 많은 경험들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대의 모든 경험들은 하나의 가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편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하다.


그대는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




두 번째로,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왜냐 하면 거기엔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랑은 오직 중심으로부터만 생겨난다.


이렇게 너무도 많은 방법들을 모아 놓은 것에는 혼(魂)이 없다, 그 안에 혼은 없다.


따라서 그대는 그 방법들 속에서 아주, 아주 효율적이 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대는 그대의 가슴이 꽃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효율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지복스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덜 비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는 덜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더 잘 조절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는 더욱 강한 에고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는 영혼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아리카와 함께, 그것은 전체적으로 달라진다.


그 중심에 깨달은 존재란 없다.


물론 많은 근원들과 같은 방향들 그리고 많은 방법들을 수집해온, 하나의 아주 영리한 사람은 있다 - 그러나 중심은 없다."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뉴 에이지의 여러 오해에서 다른 하나의 기둥은, 명상이 집중이라는 믿음이다.


“집중은 명상에 필요하다.


왜냐 하면 그것은 각성의 초점을 내면에 접근시키기 위해 그 초점을 외부 세계로부터 좁혀 들여오기 때문이다.”


라고 맥클레인은 그녀의 책에서 충고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집중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한데 모아 주는 하나의 완벽한 기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에, 명상과는 정반대이다.


명상적인 마음은 광대하며, 의식(consciousness)을 지켜보는 행위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어떤 대상 -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 에 주의(注意)를 한데 모아 좁혀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명상은 옳다.'라는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 - 명상들은 틀릴 수가 있다.”

 

라고 오쇼는 ‘Ancient Music in the Pines(#3)’에서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명상이든 그대를 집중 속으로 깊이 이끌고 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 그것은 결국 자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열리기보다는 점점 더 닫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의식을 좁혀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존재 전체를 배제하고 한 점을 향하게 되면,


그것은 그대 안에 점점 더 많은 긴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붓다란 집중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각성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의식을 좁히려고 노력해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든 장벽들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래서 그는 존재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끔 된다.


지켜보라.


존재는 동시적(同時的)이다.




"집중은 아주 커다란 비용으로 그대를 한 점을 향하게 만든다. 삶의 99퍼센트가 버려지고 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수학 문제 하나를 풀고 있다면, 그대는 새들에 귀 기울일 수가 없다 - 새들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주위에서 뛰노는 아이들, 거리에서 짖는 개들 - 그러한 것들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집중 때문에, 사람들은 삶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시도해 왔다


- 그대는 신에 집중하기 위해서 히말라야에 가거나, 동굴로 가거나, 고립된 채로 있는다.


하지만 신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신은 존재의 이 온전함(wholeness)이며, 이 순간이다.


신은 전체성이다.


이런 까닭에 과학은 절대로 신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과학의 방법이 바로 집중이며, 그 방법 때문에 과학은 절대로 신을 알 수가 없다.




“명상은 집중(concentration)이 아니다, 그것은 주목(attention)이 아니다 - 명상은 각성이다.




"자, 이제 그대에게 몇 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말하겠다.


하나는, 명상은 집중이 아니라 이완이라는 것이다 - 단순히 자신 속으로 이완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가 이완하면 할수록 그대 자신이 더욱 열려 있고, 상처 입기 쉽고, 보다 덜 경직되는 것을 느낀다,


그대는 더욱 유연하다 - 그리고 갑자기 존재가 그대를 꿰뚫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이상 하나의 바위와 같지 않다, 그대는 통로들을 갖는다.




이완이란, 그대 자신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상태 속으로 빠져들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그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긴장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위(無爲, non-doing)’의 상태이다.


그대는 단순히 이완하고, 이완의 느낌을 즐긴다.


그대 자신 속으로 이완해 들어가라, 다만 그대의 눈을 감고,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갑자기 그대는 엄청난 에너지가 그대 안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명상은 긍정이 아니다.

 



뉴에이지가 지닌 명상에 관한 지식의 공공연한 믿음 가운데 또 다른 한 가지는, 맥클레인이 "나는 빛 속에 있는 신이다." 라고


외친 것처럼, 긍정적인 확언(確言)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명상의 한 형태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종종 위로해 주는 것, 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당신을 새롭고 아름다운 사고방식으로 짜 맞추는


에밀 쿠크스(Emile Couesque)식의 정신적인 조건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쁜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명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이다.


내가 경험하는 바로는, 명상은 마음에서 모든 인상(印象)들을 비워 내는 수동적인 지켜봄이다 -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추한 것.


명상은 전체적인 탈(脫)조건화이며,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부정이며, 긍정이 아니다.




"탈조건화는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긍정을 통해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


라고 오쇼는 '선(禪)안에서 걷기, 선 안에서 앉기(Walking in Zen, Sitting in Zen #2)'에서 말하고 있다.




"긍정은 마음을 조건화시키는 길이다.


그대는 부정해야만 한다.


'네티 테니(Neti neti)'인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대는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을 때까지 부정해야만 한다.


절대적인 '비어있음'이 있고, 더 이상 부정될 내용물이 남겨져 있지 않을 때, 이것이 탈조건화된 마음의 상태이다.




"탈조건화된 마음은 전혀 하나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무심(無心, no-mind)'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긍정을 통해서 마음 없음을 성취할 수가 있단 말인가?


긍정이란 그대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자기 최면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해 오고 있는 일이다.


진정한 부정이란, 사람이 모든 종류의 믿음과 불신을 제거하도록 도와 주며,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하는 모든 조건화들을 제거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긍정은 도움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긍정은 조건화이다.


그대는 전체적인 부정성(negativity)이 필요하다.


인간은 모든 조건화들로부터 전체적으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오직 순수한 의식만이 남겨지고 다른 모든 것들은 부정된다.


단지 지켜보는 자만이 남겨지고, 지켜볼 것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다.


바라보는 자가 남겨지고, 바라볼 것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다.


경험하는 자가 남겨지고 경험할 것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동양에서 '지켜보는 자(the witness)'라고 불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초월이다 - 모든 속박의 초월, 몸, 마음 그리고 몸과 마음이 그대에게 강요하는 모든 한계로부터의 초월이다.


니르바나(Nirvana)는 가능하다, 절대적인 자유는 가능하다, 하지만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명상은 만트라를 되풀이하는 것(chanting)이 아니다.

 



소리에 의한 자기 최면이라는 특별한 종류의 최면적인 명상법인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의 초월 명상


(Transcendental Meditation, TM)이 등장해서, 소리에 의한 자기 최면이라는, 졸음을 불러오는 특정 상품이


서양을 휩쓸고 지나간 이후, 수백만명의 초보 명상자들은 곧바로 만트라를 되풀이하는 것을 명상과 동등한 것으로 생각한다.




"서양에서 만트라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매우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라고 맥클레인은 말한다.


"만트라란 명상 속에서 기대되는 평온함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마음 속에서 되뇌어지는 어떤 구절이다."


그러나 종종 만트라는 감각의 민감성을 감소시키고, 마음을 진정시켜서 일종의 졸린 듯한 무기력한 상태로 만드는데,


이것이야말로 의식을 지켜보는 것과 진짜 정반대인 것이다.




"그대는 만트라를 통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통해서 그대의 마음을 쉽사리 고요하게 만들 수가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와 같은 졸음을 평온함으로, 고요함으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라고 오쇼는 '명상: 황홀경의 기술(Meditation: The Art of Ecstasy, #3)'에서 말하고 있다.




"정말로 그것은 일종의 둔감함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대는, 그것 덕분에 인생을 더 많이 참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표면에서는 그대는 더욱 만족하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힘들, 그 신경증적인 힘들은 안에서 계속 끓어오를 것이다.


어느 날이든지 그 힘들은 폭발해서 그 표면을 붕괴시킬 것이다.




"그러한 방법들은 회유적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 방법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테크닉 없이도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드문 예외이며, 신경증적이지 않은, 운이 좋은 소수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그렇게 운이 좋지가 못하다.


소리의 움직임은, 그대가 비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대가 억압들로 채워져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대가 억압들로 채워져 있을 때 어떠한 만트라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하기조차 하다.


각각의 억압의 층은 그 소리의 길을 바꾸어 놓을 것이며, 그 궁극적인 결과는, 그대가 결코 꿈도 꾸지 못했던, 전혀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전혀 바라지도 않았던 그 무엇일 수도 있다.




그대에겐 비어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직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의 만트라가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인 사람 누구나에게 하나의 만트라를 권하지 않는다.


우선 하나의 정화(淨化)가 있어야만 한다."

 

 

 

 

명상은 채널링(channeling)이 아니다.

 



당신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육체로부터 분리된 깨달은 스승들과 채널링하는,


캘리포니아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유행은 차차 없어져 버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제는 채널링을 하는 사람들은 수천 명이고


그 말을 듣는데 돈을 지불할 고객은 단지 세 명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채널링은 뉴 에이지 인구의 99퍼센트에게 알려져 있고 실행되고 있듯이, 영원한 지혜로서 돈벌이가 되게 시장에 내다 놓은,


누군가의 잠재 의식적인 지버리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지버리쉬(gibberish):'무의미한 소리' 또는 '무의미한 소리를 내는 명상법'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명상이란, 침묵만이 남겨질 때까지 모든 내적인 목소리들을 뿌리뽑는,


하나의 지켜보는 의식(counsciousness)이다.


전체에서 절반이 넘는 경우에서 보면, 채널링은 단순히 그대 마음의 한 부분이 또 다른 한 부분에게


은하계 밖에서 온 말투로 말하는 것이다 - 드라마틱하며 에고를 충족시켜 주기는 하지만 분명히 명상은 아니다.




"채널링은 단순히 오래 된 질병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름에 불과하다."


라고 오쇼는 'Sermons in Stones(#2)'에서 말하고 있다.




"과거에 사람들은 그것을 '귀신 들림'이라고 부르곤 했다.


채널링은 귀신 들림에 대한 새로운 이름이다.


그 때 귀신이 말을 한다 -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 된 생각이고 그다지 호소력이 없다.


오래 된 나라들에서는, 그러한 일이 계속 일어난다.


'채널링'은 귀신 들림이라는 오래 된 관념에 대한 미국적인 해석이다.




"미국에는 귀신이 들리게 되어 그대에게 말하고, 그대의 말에 대답하기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 특히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그리고 분명히 그들의 언어는 옛 언어와는 다르다.


그것은 보다 과학적이다.


'채널링'이라는 단어가 바로 텔레비젼 - 채널 1번, 채널 2번..... -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채널링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대는 어떤 특정한 행성에, 어떤 특정한 은하계에 채널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어떠한, 말도 안 되는 말도 할 수가 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이 깊은 최면의 잠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하지만 열에 아홉은 진짜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진짜라면 그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란 그가 이완된다는 것, 그의 의식적인 마음이 잠에 빠진다는 것


그리고 그의 그 무의식적인 마음, 집단 무의식적인 마음, 우주 무의식적인 마음으로부터,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채널링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경쟁이 된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채널링을 하고 있다면, 왜 그대는 채널링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무런 재능도 필요치 않다, 아무런 지성도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이란 진실하지 않음, 교활함, 사기성이 전부이다.


이러한 채널링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 - 2년만 지나면 그것은 과거가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좋다.


거기엔 돈이 있고, 거기엔 - 일자리가 없는 - 젊은 세대들이 있고 또한 거기엔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하나의 전통이 있다.


거기에 영적인 가치는 없다."

 

 

 

 

명상은 그대의 ‘더 높은 자아(Higher Self)’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몇 뉴 에이지 지지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버리쉬를 듣는 데 돈을 지불하는데 싫증이 난 반면


그들은 소위 말하는 '더 높은 자아'와 접촉하는 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잠재 의식적으로, 더 높은 자아란 것을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특성들이 인격화된, 일종의 고결한 초(超)인간이라는


환상을 갖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며, 더 높은 자아와 함께 그들의 가족, 직업 그리고 여러 다른 문제들에 대해


끊임 없는 대화를 시작한다.


심지어는 실제로 '더 높은 자아들'이란 것이


'더 높은 영역들'에 존재하는, 영적인 매혹적인 '켄과 바비 인형(Ken and Barbie Dolls)'으로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더 높은 자아'란 말의 의미는 바로 그 말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


즉 그것은 그대 존재 가운데서 가장 긍정적인 요소들이며, 그대의 내면의 힘 가운데서 가장 자신감을 주는 측면이며,


무엇보다 신성(神性)이 그대에게서 사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일컫는다." 라고 맥클레인은 말한다.




"무엇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건 상관 없이, 나는 명상 속으로 들어가서 나의 더 높은 자아가 스스로를 나에게 드러내도록


허용하며,  실제로 나는 그것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영적 자아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반면, 명상 혹은 영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내 경험으로 보건대 명상이란 '아무도 아닌 자(nobody)'가 되는 기술이며,


마음 속에 드러나는 이중성을 발견해 내는 기술이며,


그대의 명상을 흩어 놓기 위해 죽어 가는 마음이 밖으로 내보내는 모든 형상과 말들을 지켜보며,


그것들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마침내 무(無) 혹은 '자아-없음(no-self)'만이 남게 되는 것을 말한다.




'더 높은 자아' 혹은 '참자아'란 '자아-없음'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형태도 없다.


그대가 그것이다.


짐짓 실재하는 듯한 더 높은 자아와 만사를 의논한다는 뉴 에이지적인 개념은 위험한 정신 분열적인 자기 기만이며,


이것은 에고에게는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대를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꿈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 뿐이다.




"'자아-없음'이 '참자아(real Self)' 혹은 '더 높은 자아(higher Self)'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 그것은 단지 같은 것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라고 오쇼는 '비밀(The Secret, #29)'에서 말하고 있다.




"'참자아'는 그것을 표현하는 긍정적인 방식이고, '자아-없음'은 부정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항상 기억하라.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보다 훨씬 낫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스승들은 항상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긍정적인 방식은 그대를 속일 수 있고, 그대를 쉽게 속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하나의 참자아를 혹은 하나의 더 높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진다면,


그대는 그 말로 인해 무엇을 이해할 것인가?


그대는 무엇이건간에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즉, 참자아란 동일한 것이 정화된 상태, 더 높고, 더 거룩하며, 더 고귀하고, 불멸이며, 신성하다고 말이다


-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이미 가지고 있던 자아에 대한 개념에 따라 그것을 상상할 것이다.


그대의 참자아는 단지, 거짓된 자아의 수정된 개념, 훌륭하게 꾸며진 개념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 위험성이다.




"'참자아는 전혀 다른 것이다.


참자아는 그대의 거짓된 자아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그대는 참되지 못한 자아의 개념을 통해서는 참자아에 관한 어떠한 개념도 가질 수가 없다.


참되지 못한 것은, 참된 것이 존재하도록 그만 존재해야 한다.


참되지 못한 것은 완전히 가 버려야 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대는 사라져야만 한다, 그 때 참된 것이 생겨난다.


그대는, 무엇이 참된 것인가에 대해, 어떠한 관념도, 그대의 꿈들 속에서도 가지지 않는다.


그대는 참되지 않으며 그대는 비실재(unreality) 속에서 살고 있다.


그대는 꿈 속에서 산다,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깨어난다는 것(awakening)이 어떤 것이 될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이 말해질 수 있다.


그대가 알고 있는 그 무엇도 거기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 자신에 대해 하나의 사물로서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는다.


상징들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상징은 그대 안에 그것만의 중심을 만들어 내고,


그 주위에 하나의 실재(reality)를 창조해 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상징을 선택하라.


그리고 자아 - 없음이 자아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나의 제안은 부정적인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을 선택함으로써 긍정적인 것에 이를 가능성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대가 긍정적인 것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의 자아는 그대의 에고를 신성화한 관념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명상은 그대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면의 인도자의 충고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더 높은 곳'에 있는 높은 사람들의 귀를 그대가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우쭐하게 만드는 일인 반면에, 그것은 또한 궁극적으로는 광기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오쇼에 따르면,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내면의 목소리는 침묵이라고 한다.


왜냐 하면 침묵 속에서, 그대는 사라지며 말할 사람도 없고 들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언급되는 소위 내면의 목소리란 오히려 그대를 한 방향으로 혹은 다른 방향으로 손짓해서 부르는,

 

저절로 일어나는 인식(認識)이나 강한 충동에 대한 하나의 은유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목소리는 없다.




"그대는 내면의 목소리들을 듣기 시작한다 -그 목소리들은 그대 자신의 생각들에 불과하다."


라고 오쇼는 '혀 끝에 감도는 도(道)의 맛(The Tongue-Tip Taste of Tao)'에서 소위 말하는 영적인 인도자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로 고통받고 있는 한 여인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아주 교활하다.


마음은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안내자가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은 매우 에고적으로 느끼며, 만족해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올 때, 만약 내가 이것이 모두 거룩한 암소의 똥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감정이 상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내게서도 '그렇다. 그대는 커다란 영적인 경험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이 모든 것에 협조하는 것을 멈춰야만 한다.


이것은 단지 신경증일 뿐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마음은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만약 그대가 협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들은 커지기 시작하고,


그러면 거기에 하나의 혼돈이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계속해서 그대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하게 된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인데도, 그대는 어떤 영적인 인도(guidance)가 그대에게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만약  그 인도대로 따라한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짓들을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러한 영적인 스승들을 따르고 있지 않다고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대의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그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영적인 구도자들의 문제이다.


조만간 이런 문제가 생긴다.


아음이 속임수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빛들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소리들을 듣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고는 말한다.


'이것은 무언가 굉장한 것이다 - 그것은 오직 너에게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드문 일이다.


너는 특별하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 너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대는 협조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완전히 비어 있게 되어야만 한다.


영적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영적인 경험은 '없음(nothingness)', 비어 있음(emptiness)의 경험이다


- 다른 모든 것은 단지 마음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명상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뉴에이지에 있어서 본질적인 어려움은


그 야망이 영성(靈性)을 가장해서 미묘한 에고에 옷을 입히고, 치장하고 미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열망이 바깥 세계에 어느정도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이제는 내면의 계급이라는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하는,


약간은 환멸을 느끼고 있는 많은 여피족들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은 당신에게 수많은 유혹적인 경험들 - 티벳에서의 별세계 여행으로부터 시작해서 차크라의 폭발,


드라마틱한 전생들, UFO의 납치, 악령으로부터의 은하계 구출, 일상 생활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더 높은 자아 와


이야기하기 - 을 보장해 준다.


나에게 그것은 당신이 결코 싫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천상의 기쁨의, 연꽃의 영토가 된다.




하지만 진정한 영성은 그대가 모든 경험, 육체적이며, 정신적이고, 감성적이며 영적인 모든 경험에 싫증나게 될 때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경험의 끝이며, 경험하는 자 자신의 끝이기도 하다.


그것이 내면에 순수한 비어 있음 외엔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 이 되는 것에 관한 전부이다.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마음의 게임이고, 기분좋은 자극이며, 전율을 가져오지만 유치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에고의 달콤한 꿈들을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적인 성장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적이지 않은 것들을 계속해서 오해하고 있다."


라고 오쇼는 '추구(The Search)'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는, 그들이 나에게 온 이후로 자신들의 쿤달리니(Kundalini)가 상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몸에 경련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아주 영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쿤달리니에 영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적 힘이다.


그것으로 인해 속임을 당하지 말라.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빛을 보고 있다.


그들이 눈을 감을 때 빛을 본다는 것이다.


단지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좋다, 그대가 빛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잠을 잘 자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이 더욱더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마음이다.


그 일에 관한 한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직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비전(vision)들을 보고 있다.


피리를 불고 있는 크리쉬나(Krishna),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붓다를.


그리고 그들은 내가 인증할 수 있도록, 내가 '그렇다 그대는 달성했다. 그대는 깨달았다(realized), 이것이 바로 영성이라는


이다.'라고 말해 줄 수 있도록 나에게 찾아온다.


그대가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피리를 불고 있는 크리쉬나, 더 이상 무엇을?


그토록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좋은 꿈들, 아름다운 꿈들이다.


즐겨라!


하지만 속임을 당하지는 말아라.


그것은 전혀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적인 것인가?


영성(靈性,spirituality)이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영성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어떤 것이며, 육체의 어떤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떻게 그대가 그대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가?

 

그대의 존재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될 수 없다.

 

그대는 주체로 남는다.

 

그대는 주체성이다.

 

 

 

"그대가 볼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은 그대가 아닐 것이다.

 

그대는 보는 자이다.

 

영성이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지켜볼 수도, 볼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이고, 지켜보는 자이고, 보는 자이다.

 

따라서 그 때 모든 경험들은 사라진다.

 

 

 

"보여질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관찰될 대상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오직 각성만이, 광대하며 차단되지 않은 각성만이,

 

어떠한 경험에 의해서도 차단되지 않은 각성만이 있을 때, 그때 그대는 영적으로 된 것이다.

 

그대는 영적으로 된다, 영성이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쿤달리니, 빛들, 비전들,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그러한 것들은 그대가 성장하고 있다는 좋은 표식들이다.

 

하지만 영적인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진정한 스승은 여정 중의 경험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그 목표에만 관심이 있다.

 

그 길은 통과되어야만 하며, 초월되어야만 한다.

 

그는 아무런 대상도, 아무런 경험도, 아무것도 없는 채로 오직, 그대의 절대적 주체성 속에서,

 

그대의 각성이 한 점의 산들바람도 없는 텅 빈 하늘에서 하나의 불꽃처럼 타오를 때의 그대에만 관심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

 

신은 없다.

 

영성은 모든 것 너머에 있다.

 

그것은 바로 넘어섬(beyondness)이다.

 

오직 그대만이 남는다, 각성한 채로, 충분히 각성한 채로, 깨어난(awakened) 채로.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

 

이 완전한 비어 있음 속에서 주체성의 불꽃이, 전적인 홀로 있음(aloneness)의 불꽃이, 각성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것을기억하라."

 

 

 

-오쇼 라즈니쉬, 오쇼 타임즈(1999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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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 훨링(Sufi Whirling)은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명상법 중의 하나이다
이 명상법은 단 한번의 경험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될만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맴을 도는 어린 아이처럼 눈을 뜬 상태에서 몸을 회전시켜라
그대의 내적 존재는 중심이 되고 육체는 수레바퀴가 되어 도공(陶工)의 녹로처럼 돌아간다
몸 전체가 돌아가고 있지만 그대는 중심에 위치한다
 
이 명상법을 행하기 세 시간 전부터는 음식이나 마실 것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다. 느슨한 옷에 맨발이면 가장 좋다. 이 명상법은 회전과 휴식의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회전을 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정해진 시간은 없으며 몇 시간이고 계속할 수 있다.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최소한 한 시간 이상 계속하는 좋다.
 
한 지점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라. 오른 팔은 위로 들어올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왼쪽 팔은 그보다 아래쪽인 옆으로 뻗은 상태에서 손바닥이 땅을 향하게 하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이 불편한 사람은 시계 방향으로 돌아도 좋다. 몸을 부드럽게 하고 눈은 뜬 상태를 유지하라. 하지만 사물이 희미한 형태로 선회하며 흐르도록 눈의 촛점을 맞추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을 유지하라.
 
처음 15분 동안은 서서히 몸을 회전시켜라. 그 다음 30분 동안은 점점 더 속도를 빨리하라. 회전이 빨라지면서 그대는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된다. 외곽은 돌개바람처럼 돌고 있지만 중앙의 주시자는 고요하게 정지해 있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회전이 빨라지면 몸이 저절로 쓰러질 것이다. 그대 스스로 쓰러질 것을 결정하거나 쓰러질 것에 대비해 사전 계획을 세우지 말라. 그대의 몸이 부드러우면 쓰러지는 것도 유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지가 그대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것이다.
 
쓰러지고 나면 이 명상법의 두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몸이 바닥에 쓰러지면 즉시 몸을 돌려 배를 땅에 대고 배꼽이 땅에 닿게 하라. 이런 식으로 눕는 것이 너무 불편한 사람은 등을 대고 누워라.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듯이 그대의 몸이 대지의 품에 안기는 것을 느껴보라. 눈을 감고 최소한 15분 동안은 이렇게 수동적인 자세와 침묵을 유지하라. 명상이 끝난 후에는 되도록이면 조용하고 비활동적인 상태로 지내라.

어떤 사람은 명상 도중 구토를 느낄지도 모른지만 2,3일 안에 이런 증상은 없어질 것이다. 그래도 구역질이 계속되면 이 명상법을 중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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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당연히 깨어있기가 쉽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자연히 잠에 빠지게 된다.
특히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에는 깨어있기가 매우 어렵다.

전체적인 상황이 잠을 몰고오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 때에는 잠들지 않는다.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이 기계적인 움직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로 용해시키는 법을 배워라. 그대가 하나의 단일체(unity)로 기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달리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대는 달리기를 명상으로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간혹 엄청난 명상을 경험한다. 그는 예기치않은 경험에 깜짝 놀란다. 한번도 그런 일을 상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달리기가 신에 대한 경험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달리기가 새로운 명상법으로 점점 더 각광받고 있다.
 
달리기를 통해서도 명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가 가득하고 온 세상이 기지개를 켜고 잠에서 깨어난다. 달리기를 하면서 그대의 몸은 활기에 넘친다. 어두운 밤이 가고 새로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의 모든 것이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듯 하며 그대는 활기가 넘치는 것을 느낀다.....어느 순간 달리는 자는 사라지고 오직 달리기만 남는다. 예기치않게 그런 순간이 온다. 몸과 마음, 영혼이 혼연일체가 되고 돌연 내면에서부터 가슴벅찬 희열이 용솟음친다.

달리기는 하는 사람이 우연히 의식의 네번째 상태인 투리야(turiya)를 경험하는 일이 간혹 있다. 그들은 그것이 투리야의 경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 즐거움의 순간을 단순히 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몸은 컨디션이 최상이었고 좋은 날씨에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충분히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 경험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 경험에 주목하기만 한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수월하게 명상에 근접하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 달리기를 하는 것은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다. 수영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들이 명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명상에 대해 낡은 관념을 머려라. 명상은 나무 아래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을 버려라. 그것은 수많은 명상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법이 맞을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명상이 아니라 끔찍한 고문과 같은 것이다. 생기발랄하고 활동적인 젊은이에게 그것은 참기 힘든 고역일뿐 명상이 아니다.
 
아침에 길을 따라 달려보라. 처음에는 반 마일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2마일, 그리고 나중에는 최소한 3마일을 달릴 수 있도록 해보라. 달리기를 할 때에는 온 몸을 사용하라. 갑옷을 입은 것처럼 둔하게 달리지 말고 손과 발등 온 몸을 사용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경쾌하게 달려라. 호흡은 배꼽에서부터 깊이 행하라. 그 다음에는 나무 아래 앉아 휴식을 취하라.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편안한 기분을 느껴보라. 이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때로는 신발을 벗고 서서 대지의 부드러움과 따스한 감촉,시원한 바람을 느껴보라. 그 순간에 대지가 주려고 하는 모든 것을 느껴보라. 그 대지의 선물들이 그대를 통해 흐르게 하라. 그리고 그대의 에너지가 대지 속으로 흐르게 하라. 대지와 친밀함을 느껴라.
대지와 친밀해지면 그대는 삶과 친밀해진 것이다. 그대의 몸과 친밀해진 것이다. 대지와 친밀해지면 그대는 존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될 것이고 예민한 감수성이 깨어날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달리기에 있어서 결코 기계적인 전문가가 되지 말라. 언제나 주의깊은 각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아마츄어 정신을 간직하라. 달리기가 기계적으로 행해진다고 느껴지면 미련없이 그만두라. 그리고 수영을 해보라. 수영 또한 기계적인 운동이 되어버리면 그때에는 춤을 추어보라. 어떤 운동을 하든 그것은 다만 깨어있는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의식을 깨어있게 하는 한 그것은 훌륭한 방편이다. 그러나 더 이상 깨어있는 상황을 조성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그때에는 그대가 다시 깨어있을 수 있는 다른 운동으로 바꾸어야 한다. 어떤 행위를 하든 그것이 기계적인 움직임이 되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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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상법은 밤중에 어두운 방에서 행하고 바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 가장 좋다

아침에 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15분 정도의 휴식이 뒤따라야 한다. 이 휴식이 필수적이다. 그렇지않으면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함을 느낄 것이다.
에너지와 융화되는 것, 이것이 기도이다. 이것은 그대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대가 변화하면 세상 전체가 변한다.


두 팔을 높이 들어올리고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하라. 존재계가 그대 안으로 흘러들어온다고 느껴라. 에너지가 팔을 타고 내려오면 그대는 미세한 떨림을 느낄 것이다. 산들바람이 지나갈 때 나뭇잎이 떨리듯이. 그 떨림을 허용하라. 그에 협조하라. 그 다음에는 그대의 몸 전체가 에너지로 진동하게 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는대로 놔두어라.
그대는 대지와 더불어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땅과 하늘, 위와 아래, 음과 양, 남성과 여성이 하나로 합쳐지고, 그대는 그 흐름에 몸을 내맡긴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버려라.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대는 용해되어 존재계와 하나가 된다.
2, 3분 후에, 또는 그대가 완전히 충족되었다고 느껴질 때 땅에 엎드려 대지에 입을 맞추어라. 그대는 신성(神性)의 에너지가 대지의 에너지와 결합될 수 있도록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 두 단계를 여섯 번 반복하라. 그래야 각각의 차크라(chakra)가 담을 허물게 된다. 여섯 번 이상 반복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 이하이면 불안을 느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기도의 상태로 잠자리에 들어라. 에너지가 거기에 있을 때 바로 잠자리에 들어라. 그러면 그대는 잠 속에서도 에너지와 더불어 흐를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밤새도록 에너지가 그대를 포위하고 계속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면 전에 느껴본 적이 없는 신선함과 활력을 느낄 것이다. 새로운 활력, 새로운 생명력이 그대를 관통해 흐를 것이고, 그대는 하루 종일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가슴 속에 새로운 진동, 새로운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다. 걸음걸이마다 새로운 춤이 느껴질 것이다.

출처: 명상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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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디서든 가능합니다. 교통체증에 갇혀 있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든 만원 최근 지하철에 서 있든, 잘 가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든 상관없습니다.

오전 7시 2분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처음으로 시작한다고 합시다. (지하철로 출근하지 않는다면 버스든 승용차든 다 좋습니다.) 그 날은 5분 정도 먼저 나오십시오. 차에 올라타기 전에 약간의 준비운동을 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심을 다 잊어버리고 평소처럼 주면 사람들과 신경전만 벌이게 될지모르거든요.

평소보다 발걸음을 조금 천천히 하십시오.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고 좀더 깊고 길게 하십시오.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이 어떤지, 태양은 밝게 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변도 둘러보십시오. 전에는 한번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 이를테면 낡은 은색담장에 햇살이 황금빛으로 반사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겁니다. 골목길 교회 지붕에 장식된 조각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노란 꽃이 심어진 길가화단이 보입니까?

좋습니다. 이제 지하철 입구에 도착했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바쁜걸음으로, 아니 심지어 뛰면서 플랫폼으로 향하고 있지요? 그런 모습은 무시하십시오. 당신은 다른 박자에 맞춰 걷고 있는 중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저기 한눈을 팔면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겁니다.

계속 그렇게 걸어가십시오,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발뒤꿈치를 툭툭 건드린다고요? 그럼 어서 가게끔 배려해 주십시오. 같이 뛰고픈 충동을 억눌러야 합니다. 그런 충동이 아주 클겁니다.

일단 열차에 올라타고 난 후에는 평소처럼 신문을 뒤적거리지 마십시오. 자리를 찾아 앉으십시오(자리가 없다면 ‘5부. 어디론가 가고있는 시간을 위해’편을 보십시오). 이제 이집트 자세를 연습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앉는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하나는 엉덩이를 의자 등받이까지 깊숙히 집어넣어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쪽으로 하십시오.

두 발은 무릎과 수직을 이루는 위치에 둡니다. 발을 단단히 바닥에 고정하십시오. 손은 무릎 위에 편안하게 두십시오. 가방이 있다면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그 위에 손을 두면 됩니다. 가방이 무거우면 무릎 사이에 내려놓으십시오.

이제 두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 있기가 불안하다면 뜨고 있어도 좋지만 이 경우 무언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부드러운 시선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른 승객과 눈이 마주치는 일은 피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유심히 관찰해서도 안 됩니다. 자, 그럼 심호흡을 시작합니다. 호흡이 바로 배에서 나오는지를 확인하고 느끼십시오. 한숨과 함께 숨을 내뱉도록 하십시오.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 숨쉬는 소리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까요.

의자와 맞닿아 있는 당신의 엉덩이를 느껴보십시오. 고약한 유행에 따라 강철처럼 단단한 고무 속옷을 입고 있는 여성이라면 이런 느낌을 가지기가 좀 어려울 겁니다. 엉덩이가 큰지 작은지, 살이 많은지 적은지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을 수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엉덩이에 살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골반 아래 튀어나온 짧은 뼈 위에 몸을 싣고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지 못할 테니까요. 자, 그러니 의자 위로 느껴지는 엉덩이 살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머리 꼭대기 부분도 의식하십시오. 앉은 자세 그대로 머리를 부드럽게 위쪽으로 잡아당긴다고 생각하면서 등의 척추를 길게 늘이십시오. ‘길게 늘이다’라는 표현은 군대식의 경직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등은 본래 약간 구부러져 있습니다. 등을 위쪽으로 늘이면서 그 굽은 모양을 느껴 보십시오. 턱 근육을 부드럽게 풀고 목도 이완된 상태인지 확인하십시오,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리를 꼬아서는 안 됩니다! 습관적으로 다리를 꼬는 사람은 그 충동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발에 살짝 힘을 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발뒤꿈치와 발바닥, 발가락 앞쪽 모두에 힘을 가하십시오. 한쪽 발에 다른 쪽보다 더 많은 무게가 실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하십시오,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상체의 미묘한 움직임을 관찰하십시오. 척추가 약간 들릴 것입니다. 어깨도 함께 들리는 것 같으면 아래쪽으로 내리십시오. 숨을 내쉴 때는 상체가 어떻게 아래로 내려가는지 살펴보십시오. 숨쉬면서 관찰을 계속해야 합니다. 꼿꼿하게 앉아있지 말고 열차가 흔들리는 것에 맞춰 몸이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척추에 부드러움과 유연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등받이에 등을 대고 있다면 견갑골을 뒤쪽으로 부드럽게 젖힙니다. 계속 심호흡을 해야합니다. 얼굴 근육도 이완시키십시오. 이마와 눈 주위, 입 주위의 근육을 부드럽게 유지하십시오.

수수께끼에 싸인 듯한 스핑크스의 침착한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수십 세기의 세월을 건너뛰어 그 불가해한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당신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에 있는 고대 이집트 여왕 하트셉수트의 붉은 화강암 상처럼 고요하고 단단한 존재입니다. 여왕의 석상은 기원전 1500년경에 만들어졌지요.

서서히 당신은 주위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놀라운 순간을 경험할 겁니다. 주위 사람들이 도저히 방해할 수 없게 되는 거죠. 발 밑에서 나일 강의 물 소리와 뱃사공의 노 젖는 소리까지 들려올지 모릅니다. 물론 시작하자마자 이런 성과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다른 기법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노력과 시간, 그리고 건강한 유머감각을 필요로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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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명상법

아침에 잠이 깨면 눈을 뜨기 전에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면서 온 몸의 근육을 쭉 뻗어보라. 그리고 3,4 분 후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웃기 시작하라. 5분 동안 마냥 웃어라. 처음에는 억지로 웃음 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위적으로 시도하는 웃음 소리 자체가 진짜 웃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때에는 웃음 속에 파묻혀 그대 자신을 잊어라.
이런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현상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자연스러운 웃음이 터져나올 것이고, 이 웃음은 그대의 하루 전체를 바꾸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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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면의 근원에서부터 어떤 에너지를 표면으로 날라다 준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고 마치 그림자처럼 웃음이 뒤따른다
그대는 이런 현상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진정으로 웃을 때 그대는 깊은 명상의 상태를 체험한다. 그 순간에 생각이 멈춘다. 웃음과 생각을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웃음과 생각은 변증법적으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그댄느 웃거나 생각하거나 둘중의 하나만을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웃는다면 생각이 멈춘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속으로 생각이 흐르고 잇다면 그대의 웃음은 불구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웃을 때, 돌연 마음이 사라진다. 내가 아는 한, 춤과 웃음은 가장 쉽고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이다. 춤 속에 몰입될 때는 생각이 멈춘다. 그대는 계속해 맴돌면서 하나의 소용돌이가 된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안에서 모든 경계와 구분이 사라진다. 그대는 자신의 육체와 존재계라는 경계선조차 망각한다. 그대가 존재계 안으로 녹아들고, 존재계가 그대 안으로 녹아든다. 존재계와 그대 사이의 경계선이 오버랩(overlap)되면서 겹쳐진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춤추고 있다면-그대가 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춤이 그대를 다루고 있다면, 춤이 그대를 완전히 소유하도록 내맡기고 있다면, 그때 생각이 멈춘다. 똑같은 일이 웃음에서도 일어난다. 웃음에 완전히 소유당해 있으면 생각이 멈춘다. 웃음은 무념(無念)의 세계로 들어가는 훌륭한 관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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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하루에 두번 이 명상법을 행하라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이 명상법을 20분동안 행하라. 아침에 제일 먼저 이 명상법을 행하라! 바로 잠자리에서 나오지 말라. 잠자리에 누운 채 행하라.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즉각!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대는 매우 예민하고 수용적이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그대는 아주 신선한 상태이므로 명상의 효과도 배가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대는 어느때보다도 마음의 영향을 덜받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거기엔 어떤 틈새가 있다. 그 틈새를 이용해 이 명상법이 그대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뚫고 들어갈 것이다.

이른 아침 그대가 막 깨어나고 온 세상이 깨어날 때, 세상 전체에는 깨어나는 에너지의 커다란 물결이 있다. 그 에너지의 물결을 이용하라. 기회를 놓치지 말라.
고대의 모든 종교는 이른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 때를 기도 시간으로 이용하곤 했다. 해가 떠오른다는 것은 존재계의 모든 에너지가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그대는 떠오르는 에너지의 물결을 쉽게 올라탈 수 있다. 아침에는 더 쉽다. 그러나 저년 때가 되면 어렵다. 에너지가 가라앉을 것이기 대문이다. 그때 그대는 흐름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는 흐름을 타고 갈 수 있다.

이른 아침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반은 잠들어 있고 반은 깬 상태에서 즉시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특별한 자세도 필요없고 목욕재계할 필요도 없다. 아무 것도 필요없다. 다만 등을 대고 침대에 누운 상태로 눈을 감아라. 그리고 숨을 들이쉴 때에는 거대한 빛이 머리를 통해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상상하라. 마치 그대의 머리 바로 위에 태양이 떠오르듯이 찬란한 황금빛이 머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대는 텅 비어있고, 황금빛이 쏟아져 들어와 더 깊이 깊이 내려간다. 그리고는 발가락으로 빠져나간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이렇게 황금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상상하라.
반면 숨을 내쉴 때에는 발가락으로 거대한 어둠이 밀려들어 온다고 상상하라. 거대한 어둠의 강물이 발가락을 통해 밀려들어와 계속 올라가다가 머리를 통해 빠져나간다. 이런 상상에 도움이 되도록 호흡을 천천히 깊게 하라. 아주 천천히 호흡하라.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에는 아주 깊게 호흡할 수 있다. 간밤의 휴식을 통해 몸이 이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머리를 통해 황금빛이 쏟아져 들어오게 하라. 머리야말로 황금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황금빛이 도움을 줄 것이다. 그 빛은 그대의 온 몸을 정화시키고 창조성으로 가득채워줄 것이다. 이것이 남성 에너지이다.
그 다음 숨을 내쉴 때에는 발가락을 통해 어둠이 밀려 들어와 위로 올라가게 하라.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것, 가령 칠흑같은 밤이나 검은 강물 같은 것이 밀려들어온다고 상상하라. 이것은 여성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가 그대를 포근하게 감싸줄 것이다. 이 에너지가 그대를 수용적으로 만들고 고요한 휴식을 줄 것이다. 이 에너지가 머리를 통해 빠져 나가게 하라. 그 다음에 나시 숨을 들이쉬면 황금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 명상법을 이른 아침에 20분 동안 행하라. 두번째로 좋은 시간은 밤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잠자리에 누워 얼마동안 릴랙스하라. 그리고 잠이 들락말락 하는 중간지점에 있는 것을 느낄 때 이 명상법을 20분동안 행하라. 만일 이 명상법을 행하면서 잠에 빠져들 수 있다면 최상이다. 왜냐하면 이 명상의 효과가 무의식 속에 남아 계속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명상법을 3개월정도 행하고 나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신체 내의 에너지 센터 중에서 가장 낮은 물라다르(muladhar) 차크라에 모여있던 에너지, 즉 섹스 센터에 모여있던 에너지가 더 이상 거기에 고여있지 않다. 이제 그 에너지가 위로 상승하고 있다.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