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속삭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2.15 낙천적인 삶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2. 2008.02.15 뉴 에이지 넌센스(New Age Nonsense)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낙천적인 삶

영혼의 속삭임 : 2008. 2. 15. 16:35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태양이 내리쬐는 것은 멋진 일이다. 바로 이것이 삶이다. 그러므로 폭풍우가 불 때 걱정을 하느니 차라리 춤을 추어라!

매일 새로운 영양물을 흡수할 때 몸은 자란다.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영혼의 영양물을 받으려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지금 그대 마음의 모든 창을 활짝 열어보자. 때에 따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햇볕이 들어온다. 인생이 그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당황한다. 종이와 신문이 바람에 펄럭이고 비가 들이쳐 옷이 젖기 때문이다. 꼭꼭 닫힌 방에서만 살아왔기에 그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무언가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태양이 내리쬐는 것은 멋진 일이다. 바로 이것이 삶이다. 그러므로 폭풍우가 불 때 걱정을 하느니 차라리 춤을 추어라! 폭풍우가 몰아치면 춤을 추어라. 폭풍 후의 고요함을 찬미하며 춤을 추어라. 힘든 일이 생겨 삶이 고단할 때 춤을 추어라. 힘든 만큼 그대는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은가. 고통도 하나의 은총임을 명심하라. 슬기롭게 다룰 수만 있다면 고통은 성장의 디딤돌이 된다.

아무 고통 없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인생은 무조차 벨 수 없는 무딘 칼날과 같다. 그러나 그대가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지성의 칼날은 날카롭게 선다. 매일 신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내일은 더한 고난을 내려주소서. 더 사나운 폭풍을 보내주소서.” 그럴 때 어떤 일이 닥쳐도 낙천적으로 사는 인생의 비밀을 터득하게 된다.


오쇼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뉴 에이지 넌센스(New Age Nonsense)]

 

 

 

비텐(Veeten)에 의한 서론




뉴에이지 운동은 기묘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뒤쳐진 것들이 한데 휘져어진, 맛좋고 유쾌하게 뒤섞인


이상한 혼합물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너무나 푹 뒤섞여서 삶아진 나머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왕겨 더미에서 영원한 씨앗을 골라내 보겠다는


모든 희망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적인 혼란이며 디즈니랜드적인 허황된 영성(靈性)이 지닌 유독성 망상(妄想)을 널리 퍼뜨리고 있다.




왜냐 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캘리포니아인(人) 영매(靈媒)들은 플레이아데스 성단(星團)으로부터 온,


육체와 분리된 깨달은 존재들이 일본의 주부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영혼의 짝(soulmate)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 주도록 허락하고 있으며, 한편 독일인 선사(禪師)들은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파도 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주말 과정 깨달음 증명서를 발급해 주고 있고, 영국의 사업가들은 그들의 애완견인 치와와의 ‘더 높은 자아(Higher Self)’와


접촉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全) 지구적이 되어 버린 뉴 에이지 운동이 지닌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그 운동이 진실, 지복(至福), 그리고 의식


즉,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서 정신만 혼란케 만드는 돈과 권력과 명성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인류의 집단적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점차 커져 가고 있는 강한 충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 에이지 운동이 지닌 우스꽝스러운 점은, 그 운동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정작 찾아야 할 곳은 빼 놓은 채로,


온갖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동이 지닌 위험한 점은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 뒤섞인 거짓말, 어설픈 진리 그리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영적인 꿈


같은 것들을 명상의 기술에 관하여 이야기한답시고, 그럴듯하게 위장한 채 수백만의 순진한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뉴 에이지 속에 깃든 자기 기만의 양(量)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 심장부에 깨달은 의식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명상의 권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뉴 에이지 서적을 8권에서 10권 정도 읽었고, 캘리포니아에서


영매들을 몇 사람 방문했으며, ‘당신의 오라를 보라(See Your Aura)’라는 주말 세미나에 참석했었고, 진짜 아틀란티스제(製)


수정 몇 개를 구입하였으며, 명상에 관한 뉴 에이지 베스트 셀러를 한 권 더 쓰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지가 무지를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소위 말하는 내적인 지식은, 진지하기는 하지만 거짓에 현혹될 가능성도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다가


마침내 그 지혜의 열매는 겉에다 설탕을 바른 영적인 패스트 푸드가 되어 결국 당신을 더욱 깊이 더욱 얼키고 설킨 꿈들 속으로


인도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뉴 에이지가 하나의 농담이라는 것도 사실인 반면, 동시에 위험한 농담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적인 어설픈 진리들 가운데 몇 가지를 명확히 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오쇼 타임즈는


뉴 에이지 운동에 사용되는 세미나 서적들 가운데 하나이며,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의 베스트 셀러인


‘내면으로 들어가기 - 내적인 변형을 위한 안내서(Going Within - A Guide for Inner Transformation)’라는 책에 언급된


뉴 에이지의 핵심적인 오해들 몇 가지를 선별적으로 싣고 있다.


이렇게 셜리 맥클레인의 저서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그녀가 유별나게 재능 있는 배우이며, 무용가인데다


자유로운 정신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그녀가 소유한 명상이라는 내면의 과학에 관해 직접적인 지식이란 것이


대부분, 3류 영매들로부터 끌어 모은 비의적이지만 무의미한 지식들과 깨달은 스승들로부터 가져온 진리 몇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비의적인 지식 그리고 명상에 관한 단편적인 것들, 서로 반대되는 여러 가지 전통들로부터의 지침들


몇 가지를 끌어 모아 한데 붙여서는 ‘새롭고 개선된 것’이라고 포장해서 내놓으려고 하는, 많은 뉴에이지 스승(guru)들의 교활한


음모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카(Arica), 집단 감수성 훈련(EST), 그리고 싸이언톨로지*


모두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신을 대상으로, 더 잘 그리고 더 빨리 팔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은 욕심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고대의 명상적 전통들을 한데 섞어 억지로 짜 맞추려는 이러한 위험한 일시적인 유행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잠재적으로 팔고 있는 것은 광기에 이르는 느린 과정일 뿐이다.


싸이언톨로지(Scientology): 미국의 공상 과학 소설가인 라파이에뜨 로날드(Lafayette Ronald)에 의해 창시된 교파로,


1950년대에 베스트 셀러였던 그의 책 'Dianetics-The Modern Science of Mental Health'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명상은 기법이 아니다.




예를 들면, ‘내면으로 들어가기(Going Within)’ 에서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은


조절이 되어진 요가 호흡법(“10초를 세는 동안에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10초를 세는 동안에 숨을 내쉬는 법을 배워라.”)


으로 시작해서, 긍정적인 만트라(“나는 마음 속으로 ‘나는 빛 속에 있는 신이다(I am God in Light)’라고 되뇌인다.”)를 외고,


요가의 여러 자세들 그리고 마음을 강제로 고요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의 작은 물체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일 명상 한 가지를 추천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미묘한 마음을 계발하고 싶어하는 뉴 에이지 지지자들에게는 대단한 것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오쇼에 따르면, 그것은 명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반복해서 강도 있게 이루어질 경우, ‘명상’을 위한 그와 같은 선의의 처방은 심리학적으로 유해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명상은 불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데, 거기에 서로 대치되는 명상 기법들을 섞는다는 것은,


그 불이 심리적 다이나마이트가 되도록 기름을 붓는 것이다.

 

 

 

“아리카(Arica)의 방법은 사랑이 없는 과학 기술(techology), 기법, 지식이다 - 그런 까닭에 거기엔 사람들을 로봇으로 바꾸어

 

버릴 위험이 있다.” 라고 오쇼는 ‘사랑의 길 (The Path of Love, #2)’ 에서 말하고 있다.




“아리카의 방법들은 서로 다른 여러 학파 즉, 수피(Sufi), 구제프(Gurjieff), 티벳, 인도, 일본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그것은 절충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그들은 기법들을 선택했다.


먼저, 그 기법들은 서로 다른 여러 학파에서 선택된다.


그 기법들 안에는 하나의 조화도 없으며, 그 기법들 안에는 중심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쌓아올려진 물건과 같다 - 한 무리의 사람들, 하나의 군중과 같으며 하나의 가족이 아니다


- 왜냐 하면 그 기법들서로 다른 학파들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수피의 기법은 선의 기법과 다르기 마련이다.


둘 다 기능을 하고, 둘 다 작동을 하지만, 그것은 그들 자체의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그 기법들은 그 체계 밖에서는 작동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한 대의 차에서 부품 하나를 꺼내서 다른 구조를 지닌 다른 차에다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작동하지 않고, 그대는 당황한다. ‘어째서 이 차가 작동하지 않는 거지?’


첫 번째 차에서는 작동을 했었다. 거기에는 하나의 조화가 있었다. 그 부품은 그 차를 위한 것이었다.


선(禪)의 방법은 선 철학 안에서 작용한다.


수피의 방법은 수피 철학 안에서 작용한다.


티벳의 방법은 비술적이고 비의적인 티벳 불교 안에서 작용한다.


요가의 방법은 파탄잘리 체계 안에서 작용한다.


그대는 그러한 방법들을 아무 곳에서나 선택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롤스 로이스에서 몇 개, 링컨에서 몇 개, 캐딜락에서 몇 개, 그리고 피아트에서 나온 몇 개의 부품들을

 

가지고, 차 한 대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계속해서 온갖 곳에서 나온 부품들을 가지고 뒤범벅을 만든다.


그대의 차가 위험하다.




“아리카는 서로 다른 학파들에서 선택해 왔다.


아리카는 매우 탐욕적이고, 절충적이다.


하지만 거기에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의 소음이다.




첫째로, 만약 그대가 아리카의 방법을 지나치게 따르면,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 주변에서 많은 경험들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중심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대의 모든 경험들은 하나의 가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편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하다.


그대는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




두 번째로,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왜냐 하면 거기엔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랑은 오직 중심으로부터만 생겨난다.


이렇게 너무도 많은 방법들을 모아 놓은 것에는 혼(魂)이 없다, 그 안에 혼은 없다.


따라서 그대는 그 방법들 속에서 아주, 아주 효율적이 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대는 그대의 가슴이 꽃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효율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지복스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는 덜 비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는 덜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더 잘 조절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는 더욱 강한 에고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는 영혼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아리카와 함께, 그것은 전체적으로 달라진다.


그 중심에 깨달은 존재란 없다.


물론 많은 근원들과 같은 방향들 그리고 많은 방법들을 수집해온, 하나의 아주 영리한 사람은 있다 - 그러나 중심은 없다."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뉴 에이지의 여러 오해에서 다른 하나의 기둥은, 명상이 집중이라는 믿음이다.


“집중은 명상에 필요하다.


왜냐 하면 그것은 각성의 초점을 내면에 접근시키기 위해 그 초점을 외부 세계로부터 좁혀 들여오기 때문이다.”


라고 맥클레인은 그녀의 책에서 충고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집중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한데 모아 주는 하나의 완벽한 기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보기에, 명상과는 정반대이다.


명상적인 마음은 광대하며, 의식(consciousness)을 지켜보는 행위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어떤 대상 -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 에 주의(注意)를 한데 모아 좁혀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명상은 옳다.'라는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 - 명상들은 틀릴 수가 있다.”

 

라고 오쇼는 ‘Ancient Music in the Pines(#3)’에서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명상이든 그대를 집중 속으로 깊이 이끌고 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 그것은 결국 자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열리기보다는 점점 더 닫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의식을 좁혀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존재 전체를 배제하고 한 점을 향하게 되면,


그것은 그대 안에 점점 더 많은 긴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




“붓다란 집중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각성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의식을 좁히려고 노력해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든 장벽들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래서 그는 존재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끔 된다.


지켜보라.


존재는 동시적(同時的)이다.




"집중은 아주 커다란 비용으로 그대를 한 점을 향하게 만든다. 삶의 99퍼센트가 버려지고 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수학 문제 하나를 풀고 있다면, 그대는 새들에 귀 기울일 수가 없다 - 새들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주위에서 뛰노는 아이들, 거리에서 짖는 개들 - 그러한 것들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집중 때문에, 사람들은 삶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시도해 왔다


- 그대는 신에 집중하기 위해서 히말라야에 가거나, 동굴로 가거나, 고립된 채로 있는다.


하지만 신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신은 존재의 이 온전함(wholeness)이며, 이 순간이다.


신은 전체성이다.


이런 까닭에 과학은 절대로 신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과학의 방법이 바로 집중이며, 그 방법 때문에 과학은 절대로 신을 알 수가 없다.




“명상은 집중(concentration)이 아니다, 그것은 주목(attention)이 아니다 - 명상은 각성이다.




"자, 이제 그대에게 몇 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말하겠다.


하나는, 명상은 집중이 아니라 이완이라는 것이다 - 단순히 자신 속으로 이완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가 이완하면 할수록 그대 자신이 더욱 열려 있고, 상처 입기 쉽고, 보다 덜 경직되는 것을 느낀다,


그대는 더욱 유연하다 - 그리고 갑자기 존재가 그대를 꿰뚫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이상 하나의 바위와 같지 않다, 그대는 통로들을 갖는다.




이완이란, 그대 자신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상태 속으로 빠져들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그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긴장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위(無爲, non-doing)’의 상태이다.


그대는 단순히 이완하고, 이완의 느낌을 즐긴다.


그대 자신 속으로 이완해 들어가라, 다만 그대의 눈을 감고,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면 갑자기 그대는 엄청난 에너지가 그대 안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명상은 긍정이 아니다.

 



뉴에이지가 지닌 명상에 관한 지식의 공공연한 믿음 가운데 또 다른 한 가지는, 맥클레인이 "나는 빛 속에 있는 신이다." 라고


외친 것처럼, 긍정적인 확언(確言)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명상의 한 형태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종종 위로해 주는 것, 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당신을 새롭고 아름다운 사고방식으로 짜 맞추는


에밀 쿠크스(Emile Couesque)식의 정신적인 조건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나쁜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명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이다.


내가 경험하는 바로는, 명상은 마음에서 모든 인상(印象)들을 비워 내는 수동적인 지켜봄이다 -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추한 것.


명상은 전체적인 탈(脫)조건화이며,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부정이며, 긍정이 아니다.




"탈조건화는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긍정을 통해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


라고 오쇼는 '선(禪)안에서 걷기, 선 안에서 앉기(Walking in Zen, Sitting in Zen #2)'에서 말하고 있다.




"긍정은 마음을 조건화시키는 길이다.


그대는 부정해야만 한다.


'네티 테니(Neti neti)'인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대는 부정할 것이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을 때까지 부정해야만 한다.


절대적인 '비어있음'이 있고, 더 이상 부정될 내용물이 남겨져 있지 않을 때, 이것이 탈조건화된 마음의 상태이다.




"탈조건화된 마음은 전혀 하나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무심(無心, no-mind)'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긍정을 통해서 마음 없음을 성취할 수가 있단 말인가?


긍정이란 그대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자기 최면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해 오고 있는 일이다.


진정한 부정이란, 사람이 모든 종류의 믿음과 불신을 제거하도록 도와 주며,


사회가 그대에게 강요하는 모든 조건화들을 제거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긍정은 도움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긍정은 조건화이다.


그대는 전체적인 부정성(negativity)이 필요하다.


인간은 모든 조건화들로부터 전체적으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오직 순수한 의식만이 남겨지고 다른 모든 것들은 부정된다.


단지 지켜보는 자만이 남겨지고, 지켜볼 것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다.


바라보는 자가 남겨지고, 바라볼 것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다.


경험하는 자가 남겨지고 경험할 것은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동양에서 '지켜보는 자(the witness)'라고 불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초월이다 - 모든 속박의 초월, 몸, 마음 그리고 몸과 마음이 그대에게 강요하는 모든 한계로부터의 초월이다.


니르바나(Nirvana)는 가능하다, 절대적인 자유는 가능하다, 하지만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명상은 만트라를 되풀이하는 것(chanting)이 아니다.

 



소리에 의한 자기 최면이라는 특별한 종류의 최면적인 명상법인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의 초월 명상


(Transcendental Meditation, TM)이 등장해서, 소리에 의한 자기 최면이라는, 졸음을 불러오는 특정 상품이


서양을 휩쓸고 지나간 이후, 수백만명의 초보 명상자들은 곧바로 만트라를 되풀이하는 것을 명상과 동등한 것으로 생각한다.




"서양에서 만트라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매우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라고 맥클레인은 말한다.


"만트라란 명상 속에서 기대되는 평온함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마음 속에서 되뇌어지는 어떤 구절이다."


그러나 종종 만트라는 감각의 민감성을 감소시키고, 마음을 진정시켜서 일종의 졸린 듯한 무기력한 상태로 만드는데,


이것이야말로 의식을 지켜보는 것과 진짜 정반대인 것이다.




"그대는 만트라를 통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통해서 그대의 마음을 쉽사리 고요하게 만들 수가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와 같은 졸음을 평온함으로, 고요함으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라고 오쇼는 '명상: 황홀경의 기술(Meditation: The Art of Ecstasy, #3)'에서 말하고 있다.




"정말로 그것은 일종의 둔감함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대는, 그것 덕분에 인생을 더 많이 참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표면에서는 그대는 더욱 만족하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힘들, 그 신경증적인 힘들은 안에서 계속 끓어오를 것이다.


어느 날이든지 그 힘들은 폭발해서 그 표면을 붕괴시킬 것이다.




"그러한 방법들은 회유적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 방법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테크닉 없이도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드문 예외이며, 신경증적이지 않은, 운이 좋은 소수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그렇게 운이 좋지가 못하다.


소리의 움직임은, 그대가 비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대가 억압들로 채워져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대가 억압들로 채워져 있을 때 어떠한 만트라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하기조차 하다.


각각의 억압의 층은 그 소리의 길을 바꾸어 놓을 것이며, 그 궁극적인 결과는, 그대가 결코 꿈도 꾸지 못했던, 전혀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전혀 바라지도 않았던 그 무엇일 수도 있다.




그대에겐 비어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직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의 만트라가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인 사람 누구나에게 하나의 만트라를 권하지 않는다.


우선 하나의 정화(淨化)가 있어야만 한다."

 

 

 

 

명상은 채널링(channeling)이 아니다.

 



당신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육체로부터 분리된 깨달은 스승들과 채널링하는,


캘리포니아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유행은 차차 없어져 버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제는 채널링을 하는 사람들은 수천 명이고


그 말을 듣는데 돈을 지불할 고객은 단지 세 명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채널링은 뉴 에이지 인구의 99퍼센트에게 알려져 있고 실행되고 있듯이, 영원한 지혜로서 돈벌이가 되게 시장에 내다 놓은,


누군가의 잠재 의식적인 지버리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지버리쉬(gibberish):'무의미한 소리' 또는 '무의미한 소리를 내는 명상법'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명상이란, 침묵만이 남겨질 때까지 모든 내적인 목소리들을 뿌리뽑는,


하나의 지켜보는 의식(counsciousness)이다.


전체에서 절반이 넘는 경우에서 보면, 채널링은 단순히 그대 마음의 한 부분이 또 다른 한 부분에게


은하계 밖에서 온 말투로 말하는 것이다 - 드라마틱하며 에고를 충족시켜 주기는 하지만 분명히 명상은 아니다.




"채널링은 단순히 오래 된 질병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름에 불과하다."


라고 오쇼는 'Sermons in Stones(#2)'에서 말하고 있다.




"과거에 사람들은 그것을 '귀신 들림'이라고 부르곤 했다.


채널링은 귀신 들림에 대한 새로운 이름이다.


그 때 귀신이 말을 한다 -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 된 생각이고 그다지 호소력이 없다.


오래 된 나라들에서는, 그러한 일이 계속 일어난다.


'채널링'은 귀신 들림이라는 오래 된 관념에 대한 미국적인 해석이다.




"미국에는 귀신이 들리게 되어 그대에게 말하고, 그대의 말에 대답하기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 특히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그리고 분명히 그들의 언어는 옛 언어와는 다르다.


그것은 보다 과학적이다.


'채널링'이라는 단어가 바로 텔레비젼 - 채널 1번, 채널 2번..... -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채널링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대는 어떤 특정한 행성에, 어떤 특정한 은하계에 채널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어떠한, 말도 안 되는 말도 할 수가 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이 깊은 최면의 잠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하지만 열에 아홉은 진짜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진짜라면 그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란 그가 이완된다는 것, 그의 의식적인 마음이 잠에 빠진다는 것


그리고 그의 그 무의식적인 마음, 집단 무의식적인 마음, 우주 무의식적인 마음으로부터,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채널링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경쟁이 된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채널링을 하고 있다면, 왜 그대는 채널링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무런 재능도 필요치 않다, 아무런 지성도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이란 진실하지 않음, 교활함, 사기성이 전부이다.


이러한 채널링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 - 2년만 지나면 그것은 과거가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좋다.


거기엔 돈이 있고, 거기엔 - 일자리가 없는 - 젊은 세대들이 있고 또한 거기엔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하나의 전통이 있다.


거기에 영적인 가치는 없다."

 

 

 

 

명상은 그대의 ‘더 높은 자아(Higher Self)’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몇 뉴 에이지 지지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지버리쉬를 듣는 데 돈을 지불하는데 싫증이 난 반면


그들은 소위 말하는 '더 높은 자아'와 접촉하는 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잠재 의식적으로, 더 높은 자아란 것을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특성들이 인격화된, 일종의 고결한 초(超)인간이라는


환상을 갖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며, 더 높은 자아와 함께 그들의 가족, 직업 그리고 여러 다른 문제들에 대해


끊임 없는 대화를 시작한다.


심지어는 실제로 '더 높은 자아들'이란 것이


'더 높은 영역들'에 존재하는, 영적인 매혹적인 '켄과 바비 인형(Ken and Barbie Dolls)'으로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더 높은 자아'란 말의 의미는 바로 그 말 자체에 내포되어 있다.


즉 그것은 그대 존재 가운데서 가장 긍정적인 요소들이며, 그대의 내면의 힘 가운데서 가장 자신감을 주는 측면이며,


무엇보다 신성(神性)이 그대에게서 사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일컫는다." 라고 맥클레인은 말한다.




"무엇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건 상관 없이, 나는 명상 속으로 들어가서 나의 더 높은 자아가 스스로를 나에게 드러내도록


허용하며,  실제로 나는 그것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영적 자아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반면, 명상 혹은 영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내 경험으로 보건대 명상이란 '아무도 아닌 자(nobody)'가 되는 기술이며,


마음 속에 드러나는 이중성을 발견해 내는 기술이며,


그대의 명상을 흩어 놓기 위해 죽어 가는 마음이 밖으로 내보내는 모든 형상과 말들을 지켜보며,


그것들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마침내 무(無) 혹은 '자아-없음(no-self)'만이 남게 되는 것을 말한다.




'더 높은 자아' 혹은 '참자아'란 '자아-없음'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형태도 없다.


그대가 그것이다.


짐짓 실재하는 듯한 더 높은 자아와 만사를 의논한다는 뉴 에이지적인 개념은 위험한 정신 분열적인 자기 기만이며,


이것은 에고에게는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대를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꿈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 뿐이다.




"'자아-없음'이 '참자아(real Self)' 혹은 '더 높은 자아(higher Self)'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 그것은 단지 같은 것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라고 오쇼는 '비밀(The Secret, #29)'에서 말하고 있다.




"'참자아'는 그것을 표현하는 긍정적인 방식이고, '자아-없음'은 부정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항상 기억하라.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보다 훨씬 낫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스승들은 항상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긍정적인 방식은 그대를 속일 수 있고, 그대를 쉽게 속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하나의 참자아를 혹은 하나의 더 높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진다면,


그대는 그 말로 인해 무엇을 이해할 것인가?


그대는 무엇이건간에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즉, 참자아란 동일한 것이 정화된 상태, 더 높고, 더 거룩하며, 더 고귀하고, 불멸이며, 신성하다고 말이다


-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이미 가지고 있던 자아에 대한 개념에 따라 그것을 상상할 것이다.


그대의 참자아는 단지, 거짓된 자아의 수정된 개념, 훌륭하게 꾸며진 개념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 위험성이다.




"'참자아는 전혀 다른 것이다.


참자아는 그대의 거짓된 자아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그대는 참되지 못한 자아의 개념을 통해서는 참자아에 관한 어떠한 개념도 가질 수가 없다.


참되지 못한 것은, 참된 것이 존재하도록 그만 존재해야 한다.


참되지 못한 것은 완전히 가 버려야 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대는 사라져야만 한다, 그 때 참된 것이 생겨난다.


그대는, 무엇이 참된 것인가에 대해, 어떠한 관념도, 그대의 꿈들 속에서도 가지지 않는다.


그대는 참되지 않으며 그대는 비실재(unreality) 속에서 살고 있다.


그대는 꿈 속에서 산다,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대는 깨어난다는 것(awakening)이 어떤 것이 될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이 말해질 수 있다.


그대가 알고 있는 그 무엇도 거기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 자신에 대해 하나의 사물로서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는다.


상징들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상징은 그대 안에 그것만의 중심을 만들어 내고,


그 주위에 하나의 실재(reality)를 창조해 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상징을 선택하라.


그리고 자아 - 없음이 자아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나의 제안은 부정적인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을 선택함으로써 긍정적인 것에 이를 가능성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대가 긍정적인 것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길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의 자아는 그대의 에고를 신성화한 관념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명상은 그대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면의 인도자의 충고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더 높은 곳'에 있는 높은 사람들의 귀를 그대가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우쭐하게 만드는 일인 반면에, 그것은 또한 궁극적으로는 광기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오쇼에 따르면,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내면의 목소리는 침묵이라고 한다.


왜냐 하면 침묵 속에서, 그대는 사라지며 말할 사람도 없고 들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언급되는 소위 내면의 목소리란 오히려 그대를 한 방향으로 혹은 다른 방향으로 손짓해서 부르는,

 

저절로 일어나는 인식(認識)이나 강한 충동에 대한 하나의 은유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목소리는 없다.




"그대는 내면의 목소리들을 듣기 시작한다 -그 목소리들은 그대 자신의 생각들에 불과하다."


라고 오쇼는 '혀 끝에 감도는 도(道)의 맛(The Tongue-Tip Taste of Tao)'에서 소위 말하는 영적인 인도자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로 고통받고 있는 한 여인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아주 교활하다.


마음은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안내자가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은 매우 에고적으로 느끼며, 만족해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올 때, 만약 내가 이것이 모두 거룩한 암소의 똥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감정이 상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내게서도 '그렇다. 그대는 커다란 영적인 경험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이 모든 것에 협조하는 것을 멈춰야만 한다.


이것은 단지 신경증일 뿐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마음은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만약 그대가 협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들은 커지기 시작하고,


그러면 거기에 하나의 혼돈이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계속해서 그대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하게 된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인데도, 그대는 어떤 영적인 인도(guidance)가 그대에게 찾아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만약  그 인도대로 따라한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짓들을 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러한 영적인 스승들을 따르고 있지 않다고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대의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그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영적인 구도자들의 문제이다.


조만간 이런 문제가 생긴다.


아음이 속임수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불빛들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소리들을 듣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고는 말한다.


'이것은 무언가 굉장한 것이다 - 그것은 오직 너에게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드문 일이다.


너는 특별하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 너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대는 협조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완전히 비어 있게 되어야만 한다.


영적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영적인 경험은 '없음(nothingness)', 비어 있음(emptiness)의 경험이다


- 다른 모든 것은 단지 마음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명상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뉴에이지에 있어서 본질적인 어려움은


그 야망이 영성(靈性)을 가장해서 미묘한 에고에 옷을 입히고, 치장하고 미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열망이 바깥 세계에 어느정도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이제는 내면의 계급이라는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하는,


약간은 환멸을 느끼고 있는 많은 여피족들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뉴에이지 운동은 당신에게 수많은 유혹적인 경험들 - 티벳에서의 별세계 여행으로부터 시작해서 차크라의 폭발,


드라마틱한 전생들, UFO의 납치, 악령으로부터의 은하계 구출, 일상 생활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더 높은 자아 와


이야기하기 - 을 보장해 준다.


나에게 그것은 당신이 결코 싫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천상의 기쁨의, 연꽃의 영토가 된다.




하지만 진정한 영성은 그대가 모든 경험, 육체적이며, 정신적이고, 감성적이며 영적인 모든 경험에 싫증나게 될 때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경험의 끝이며, 경험하는 자 자신의 끝이기도 하다.


그것이 내면에 순수한 비어 있음 외엔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 이 되는 것에 관한 전부이다.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마음의 게임이고, 기분좋은 자극이며, 전율을 가져오지만 유치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에고의 달콤한 꿈들을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적인 성장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적이지 않은 것들을 계속해서 오해하고 있다."


라고 오쇼는 '추구(The Search)'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는, 그들이 나에게 온 이후로 자신들의 쿤달리니(Kundalini)가 상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몸에 경련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아주 영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쿤달리니에 영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적 힘이다.


그것으로 인해 속임을 당하지 말라.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빛을 보고 있다.


그들이 눈을 감을 때 빛을 본다는 것이다.


단지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좋다, 그대가 빛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잠을 잘 자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이 더욱더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마음이다.


그 일에 관한 한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직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비전(vision)들을 보고 있다.


피리를 불고 있는 크리쉬나(Krishna),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붓다를.


그리고 그들은 내가 인증할 수 있도록, 내가 '그렇다 그대는 달성했다. 그대는 깨달았다(realized), 이것이 바로 영성이라는


이다.'라고 말해 줄 수 있도록 나에게 찾아온다.


그대가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피리를 불고 있는 크리쉬나, 더 이상 무엇을?


그토록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좋은 꿈들, 아름다운 꿈들이다.


즐겨라!


하지만 속임을 당하지는 말아라.


그것은 전혀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적인 것인가?


영성(靈性,spirituality)이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만약 그대가 영성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어떤 것이며, 육체의 어떤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떻게 그대가 그대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가?

 

그대의 존재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될 수 없다.

 

그대는 주체로 남는다.

 

그대는 주체성이다.

 

 

 

"그대가 볼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은 그대가 아닐 것이다.

 

그대는 보는 자이다.

 

영성이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지켜볼 수도, 볼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이고, 지켜보는 자이고, 보는 자이다.

 

따라서 그 때 모든 경험들은 사라진다.

 

 

 

"보여질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관찰될 대상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오직 각성만이, 광대하며 차단되지 않은 각성만이,

 

어떠한 경험에 의해서도 차단되지 않은 각성만이 있을 때, 그때 그대는 영적으로 된 것이다.

 

그대는 영적으로 된다, 영성이란 하나의 경험이 아니다.

 

 

 

"쿤달리니, 빛들, 비전들,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그러한 것들은 그대가 성장하고 있다는 좋은 표식들이다.

 

하지만 영적인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진정한 스승은 여정 중의 경험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그 목표에만 관심이 있다.

 

그 길은 통과되어야만 하며, 초월되어야만 한다.

 

그는 아무런 대상도, 아무런 경험도, 아무것도 없는 채로 오직, 그대의 절대적 주체성 속에서,

 

그대의 각성이 한 점의 산들바람도 없는 텅 빈 하늘에서 하나의 불꽃처럼 타오를 때의 그대에만 관심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

 

신은 없다.

 

영성은 모든 것 너머에 있다.

 

그것은 바로 넘어섬(beyondness)이다.

 

오직 그대만이 남는다, 각성한 채로, 충분히 각성한 채로, 깨어난(awakened) 채로.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

 

이 완전한 비어 있음 속에서 주체성의 불꽃이, 전적인 홀로 있음(aloneness)의 불꽃이, 각성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것을기억하라."

 

 

 

-오쇼 라즈니쉬, 오쇼 타임즈(1999년 7.8월호)-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