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묵힐수록 달콤한 보이차
느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불필요한 것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삶의 여유로움과 건강함을 즐기는 순간에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이런 ‘느림의 미학’을 향유하고자 할 때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것이 바로 차다.
그런데 지금 목으로 넘어가는 차 한 잔이 고가의 골동품과 비슷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갓 생산된 보이차 한 조각은 최고 3만원 정도지만 150년 된 보이차는 한 조각에 1200만원을 호가한다.
얼핏 이름만 들어서는 어느 나라 차인지 헷갈리는 보이차는 중국의 명차로 17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보이차는 중국 변방인 윈난성의 소수 민족이 마시기 시작한 발효차다. 당시에는 찻잎을 토관에 넣고 볶은 다음 바로 뜨거운 물을 부어 끓여 마셨다고 한다.
이후 중국 촉나라의 재상이었던 제갈공명이 마셨던 차로 윈난성 푸얼현 차 시장에 출하되면서 푸얼차, 즉 보이차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따라서 보이차란 이름의 유래는 생산지명이 아닌 운송을 위해 윈난성 푸얼현에 차 거래시장이 형성되면서 지역명을 따 불리게 된 것이다. 보이차가 웰빙차로 이름을 떨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윈난 대엽종 차나무의 신선한 찻잎을 사용한다. 둘째, 솥에 덖거나 대바구니에 넣고 찌는 살청·유념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산화 방지 효과가 있다. 셋째, 자연건조시킨 모차를 쪄 덩어리로 만들어 보관하며 서서히 공기와 접촉하는 자연발효 과정을 거친다. 즉, 충분히 시간을 두고 농익혀 먹는 우리의 발효 식품이나 포도와 세월이 함께 녹아든 와인에 버금가는 히스토리와 효능이 보이차에는 있다.
앤티크 족보를 가진 보이차 컬렉션
갓 딴 어린 찻잎을 사용해야 고품질인 녹차와 달리 보이차는 오래 묵힐수록 깊은 맛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체로 제조한 지 20년 이상이면 최고품의 반열에 낄 수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좋은 차나무 잎을 사용해야 하며 정갈한 찻물을 만나야 부드럽고 마시기 좋은 보이차 한 잔이 만들어진다. 좋은 찻물을 선택하는 과정을 ‘택수’, 차를 끓이는 주전자를 ‘자사호’라 칭하는 것에는 이런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앤티크라고도 불리는 명품 보이차의 분류법은 크게 빈티지(제조연도)와 차의 모양으로 나뉜다. 차를 다듬은 모양에 따라 병차(접시 모양), 산차(찻잎 모양 그대로), 전차(사각형), 타차(만두 모양), 고타차(버섯 모양)로 불린다. 보이차의 빈티지는 고유번호를 확인하면 누구나 쉽게 분석 가능하다.
처음 두 자리 숫자는 차의 제조연도이고 세 번째 숫자는 원료인 모차의 등급, 네 번째 숫자는 차공장의 번호(쿤밍 1, 멍하이 2, 샤관 3, 푸얼 4)다. 예를 들어 7452는 멍하이 차창에서 1974년에 5등급의 모차로 제조된 보이차로 지금 볼 수 있는 가장 이른 보이병차 중 하나다.
40~60년을 기다려 함께 나누는 차 한 잔
결국 ‘호로록~’ 소리 내어 마시는 차 한 잔일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많은 사람을 보이차의 이끌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보이차는 후발효차로 맛이 순하고 깊고 풍부하다. 색은 홍갈색이고 ‘녹나무 향이 나면 30년 이상, 연뿌리 향이 나면 20년’이라 할 만큼 해묵은 향이 두드러지며 적당한 조건에서 잘 보관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품질이 좋아져 바야흐로 진품 보이차가 된다.
차 애호가들이 보이차를 음미할 때 흔히 ‘달다, 목 넘김이 부드럽다, 잡맛이 없다, 맛이 풍부하고 깊다, 농도가 고르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차를 마시는 것이 단지 음료를 들이켜는 것이 아니라 정신 수양에도 관련이 있음을 여러 형용사의 등장으로 짐작할 수 있다.
끊임없이 미각을 자극해 뇌에 기분 좋은 신호를 보내고 입 속에선 단침이 고이게 하는 것이다. 맛난 저녁 식사 후에 먹는 디저트의 달콤함을 보이차 한 모금으로 경험할 수 있다니 이 또한 보이차를 끊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요즘 가장 애용되는 보이차의 형태는 보이병차로 7개들이(357g) 한 세트에 10만원 내외. 먹기 편하게 낱개 포장된 24개 세트는 2만5000원 정도로 선물용으로 인기가 좋다. 4인 기준으로 7~10g을 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을 가득 부어 헹궈낸 후 우려 마신다. 경우에 따라 냄새를 맡아 보고 잡냄새가 가시면 잔에 나누어 따라 마신다. 쪼갠 차 덩어리는 항아리나 흙으로 만든 그릇에 넣어 두면 40~60년까지도 보관이 가능하다.
파란만장한 중국 근현대사를 돌아보건대 100년 이상 된 보이차인 금과공차를 만나는 것은 경제력은 물론이고 천운이 따라야 한다. 고가의 이면에는 한 세기가 다하도록 사람과 함께 숨을 쉬며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인고의 시간들이 있었으니 비싸다 해도 수긍할 수밖에. 혼자 즐길 때는 소박한 권태로움을, 여럿이 함께 즐길 때는 공평무사한 공유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보이차이기에 그 깊은 차의 세계를 이제 온몸으로 되짚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