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삶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욕망은 무언가를 '더하여' 좀더 풍성해 지려는 욕구이다.
반면 모든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어'
자신이 작고 초라해 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더하고 잃어 버리는 두가지 활동은
생명이란 것이 원래 줄 수도 빼앗을수도 없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풍요한 생명은 이미 지금 이순간 당신 안에 존재한다.

당신은 말한다. '할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렇다. 하지만 당신이 하는 일의 질은 어떠한가?
일터로 차를 운전하고 고객과 대화하고
컴퓨터 작업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며
나날의 삶을 살기위한 수많은 일들을 할 때
당신은 얼마나 전념하여 일을 처리하는가?

당신의 일은 순응한 것인가 순응하지 못한 것인가?
그것이 바로 당신 삶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노력을 얼마나 했느냐가 아니다.
노력이란 긴장과 스트레스를 수반하며
미래에 일정지점을 도달할 '필요성'을 뜻하며
특정의 결과를 이루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신의 마음속에 지금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
조금이라도 있음을 감지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삶을 부정하는 일이므로
당연히 진정한 성공은 불가능하다.

가장 고통스럽고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황속에
가장 깊은 선(善)이 감추어져 있다.
모든 재난 속에는 사랑의 씨앗이 들어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커다란 상실과 질병을 겪은 사람들,
감옥에 갇혔거나 곧 죽음을 맞이 할 사람들이
전혀 받아 들일 수 없었던 것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평화를 얻은 것을 볼 수 있다.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 들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찾아 온다.



인간은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인간은 과거의 추억에 잠겨 있지 않으면
미래에의 기대에 가득 차 있다.
그런 와중에 문제로 점철 된 삶의 미로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자연에서 분리 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우주 전체에 무수히 많은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는 '한생명'의 일부이다.
그 무수한 형태는 모두 서로 온전히 연결 되어 있다.

꽃 한송이, 나무 한그루가
성스러움, 아름다움, 깊은 고요함과
당당함 속에 거하는 것을 내가 바라 볼 때
나는 그 꽃과 나무에게 무언가를 보태는 것이다.

나의 인식과 맑은 마음을 통해서
자연 역시 제 자신을 알게 된다.
자연은 바로 나를 통해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그가 하는 행동에 눈을 감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의 행동을 길들여진 양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라는 뜻이다.

그의 정체성을 그것에만 근거해서 수립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 뿐 아니라 그 사람도 습관, 형식,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동일하게 여기는 것에서 해방 된다.

인간관계에서 두려움과 욕망을 넘어서는 것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랑은 그 무엇도 원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과거가 나의 과거이고,
그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며,
그녀의 의식수준이 나의 의식수준이라면
나도 꼭 그녀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용서와 자비 그리고 평화로움이 온다.

궁극적으로 남이란 없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만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숲 속을 지나노라면
온갖 생명이 풍요롭다.
하지만 몇 발자국마다 쓰러진 나무들,
삭아 들어가는 나뭇등걸,
썩어가는 나뭇잎이 있어 물질의 해체를 보게 된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좀더 깊이 살펴보면
삭아 들어가는 둥치와 썩어 가는 나뭇잎은
새생명을 태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썩어가는 과정에서도 생명으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미생물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자들이 스스로 재배치되고 있다.
그 곳 어디에도 죽음 은 없다.
다만 생명의 형태가 바뀌는 변태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삶에는 반대가 없다.
죽음의 반대는 탄생이다. 그리고 삶은 영원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정체성과 자아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아 한다.
죽음의 공포가 그토록 심한 것도
그런 마음에 기인 한 것이다.

'나'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름과 형상이 그 귀중한 '나'라는 착각,
'나의 이야기'가 '나'라는 착각속에 살고 있다.
그러한 '나'는 다만 의식의 장(場)에 생긴
일시적 형상에 불과 할 뿐인데 말이다.

그렇게 '형상=나'라는 생각만을 하면
내 안 깊숙이 존재하는 생명이며
순수 의식임을 알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원이며,
그것만이 내가 잃어 버릴 수 없는 유일한 것임을 말이다.


모든 사고와 재난에는 늘 구원이 가능성이 들어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 보낼 뿐이다.

고통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지금까지 겪은 고통이 없었다면
나라는 사람은 깊이가 부족했을 것이다.
겸손과 자비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이책도 읽고 있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에고의 단단한 껍질을 부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고통이 목적을 다하는 순간이 온다.

나에게 더 이상의 고통은 필요 없다고
깨닫는 그순간까지만
고통은 필요한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1948년 독일에서 태어나 13세에 스페인으로 이주하였다가
현재는 캐나다 벤쿠버에서 살고 있다. 영국 런던대학을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늘 우울증에 시달렸고
삶의 무의미함과 자살 충동에 압도 되었다.
그러다가 29세가 되던해에 심오한 깨달음을 얻어,
한순간에 삶의 변화가 일어 난다. 이런 깨달음은 그에게 자연히 일어 난 일로
그는 정식 수행을 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돈오자가 되었다.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