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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3 현대인의 중독증세(그 원인과 처방) 펌글 by 분별없는 아이디어
중독이 넘쳐나는 사회

‘노예근성’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의지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떠한 힘이나 권세에 끌려 다녀야만 안심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그런 부류이다. 이집트에서의 히브리 노예들이 바로 그러했다.

처음에 노예로 팔려 갔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그 노예생활에서 벗어날까도 생각해 보고 도망칠 궁리도 해 보았겠지만 점차 그 번뜩이는 의지가 무디어가면서 노예생활 자체에 익숙해져 간다. 나중에는 노예 생활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오히려 편안하게까지 느껴지면서 그 노예 생활에서 자유함을 누리도록 해 주겠다고 하면 불안해 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 출애굽을 하기 위해 모세의 인도대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 얼마나 백성들이 불평하고 불만이 많았던가? 오죽했으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할 때 먹었던 음식들을 향수하면서 모세를 향해 별 불평과 불만을 다 터뜨렸을까?

문제는 그러한 노예의 근성이 지금도 이 세상에 편만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게 무슨 소리일까’하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지적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시대를 중독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말을 한다. 현대 사회의 다양화, 멀티화와 함께 현대판 노예들이 추종하는 대상들의 종류가 훨씬 더 폭 넓어졌을 뿐이다.

이른 바 중독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독이란 어떠한 힘이나 실체에 속박당해 있는 상태로 자신도 모르게 그 대상에 집착하여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러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중독 현상은 어느 한 개인이 어떠한 대상이나 힘에 집착하는 것같이 그 사람을 휘어잡는 힘과 대상도 그 세력에 휘어 잡힌 상대자를 결코 놓아주지 않으려는 강한 집착을 가진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금단 증상(withdrawal symptom)이다.

거기에다가 중독을 일으키는 힘이나 대상들은 호환 기능이 강해서 중독자들은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특성들까지 보이게 된다. 이른바 풍선 효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뿌리를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중독 현상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이집트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또 빠져나올 생각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과 같다. 결국 모세를 이용한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중독의 힘이 얼마나 집요하고 무서운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독 현상이 이 사회를 얼마나 주장하고 있을까?

우선 중독의 종류들을 살펴보면 이 사회에 퍼져있는 독버섯이 얼마나 광대하고 다양한지 금방 알 수가 있다. 가장 많이들 거론하는 중독으로 알코올중독이 있으며 또 마약 같은 약물중독, 줄담배를 피워야 안정을 찾는 담배중독, TV 중독, 포르노중독을 포함한 성 중독, 탐식의 중독, 물건을 마구 사 대는 쇼핑 중독, 히브리 노예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중독, 운동에 살고 운동에 죽는 운동 중독, 날마다 컴퓨터만 붙들고 사는 인터넷 중독, 심지어 분노 중독, 카페인 중독, 공상 중독, 도벽 중독, 잠 중독, 폭력 중독, 단 음식 중독, 수면제 중독, 약 중독, 거짓말 중독, 두려움 중독을 포함한 공포 중독, 청량음료 중독, 깔끔함이나 지저분 중독,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중독, 그리고 교회 중독 같은 종교중독까지 너무나도 다양하다.

우선 알코올중독만 해도 얼마나 심각한지 모른다. 한국은 한마디로 알코올 중독자 대국이다. 원래 술에 대해 관대한 문화 탓이기도 하지만 서울대 의대 이정균 교수팀의 분석에 의하면 성인 5명중 1명이 치료가 필요한 알코올 중독자(21.7%)라고 한다. 미국의 13.7%, 독일의 13.1%에 비교하면 혀를 내두를 수치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의 음주량은 슬로베니아(연간 15.2ℓ)에 이어 세계 두 번째(연간 14.4ℓ)이다. 그 수량이면 성인 한 사람이 매주 소주 두병 반 정도를 마시는 양이다. 유전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서구인에 비해 절반밖에 안되는 체질을 생각한다면 더욱 심각한 수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마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당연히 술로 인한 피해는 천문학적(약 16조원 추산)이다. 문제는 그러한 알코올 중독자들이 스스로 중독자라고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도박중독만 해도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서울형사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들의 2/3(66.6%)가 돈내기 도박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성인의 9.3%가 도박중독 상태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마약 중독의 경우, 검찰의 추산으로는 약 20만 명 이상의 중독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중독자는 매년 10%이상씩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중독 연령이 점점 낮아지는데, 19세 이하가 전체 마약 사범의 62% 정도를 차지할 정도라니 가히 입이 닫히지 않는다.

또 요즘 많이 거론되는 인터넷 중독의 경우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의 조사 결과 초중고생 5명중 1명꼴로 중독자라고 발표하여 충격을 준 바 있다.
담배중독 역시 심각하다. 2003년, 20세

이상 성인의 흡연율 조사에 따르면 남자의 흡연율은 60.5%로 전년(69.9%)보다 약 9%포인트 떨어진 반면, 여성의 흡연율은 6%로, 전년(3.1%)에 비해 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의 니코틴 중독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중독 현상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한마디로 이 사회는 중독이 만연해 있으며, 어떻게 보면 그 중독 자체를 용인하고 또 부추기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중독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중독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중독 현상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은 잠언 23장이다. 특별히 29절부터 35절까지 그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알코올 중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29절에 보면 알코올 중독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적고 있다. 29절과 30절을 쉽게 번역하면 이렇다. “`급살을 맞았구나. 아아, 비참하구나' 하고 외쳐 대는 사람이 누구냐 ? 토닥거리며 싸움질만 하는 사람이 누구냐 ? 까닭도 없이 얻어맞기만 하는 사람이 누구냐 ? `에이, 더러워 못살겠다!!' 하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누구냐? 불그스레하게 두 눈이 달아오른 사람이 누구냐 ? 30 술이라 하면 정신 못 차리고 이술 저술 뒤섞어서 끊임없이 마셔 대는 술꾼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냐 ?“(현대어 성경)

그러면서 31절에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곧 술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을 유혹할 정도로 붉고 그 술을 담은 잔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얼른 마시고 싶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술도 얼마나 목에 순하게 넘어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것을 보지도 말아야지 보게 되면 유혹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창세기 3장 6절에서 선악과가 그러하였듯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들이 판을 친다. 매스미디어 시대에 TV의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TV에서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무엇인가 빠져드는 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조직폭력을 선하고 아름답게 그리면 순식간에 청소년들에게 조직폭력 동경주의가 생기고, ‘옥탑방 고양이’같이 동거를 멋있게 묘사하면 순식간에 동거문화가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러니 자신들의 우상인 탤런트나 배우들이 술을 먹고 담배 피우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정한 이치라는 것이다. 그것이 표현의 자유일지 모르나 영향력은 ‘나 몰라라’하는 후안무치의 행동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아예 보지 말아야지 보기만 하면 유혹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어서 그 술의 올무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서술한다. 32절부터 35절까지의 쉬운 번역이다.

“일단 한번 마셨다가는 마침내 독사처럼 날카롭게 물어뜯는 것이 술이다. 살무사처럼 그 독이 마구 퍼져 나간다. 눈에는 이상한 것들이 보이고 속에서는 헛된 소리만 자꾸 나올 뿐이며 바다 한가운데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잠에 곯아떨어진 사람과 같고 미친 듯이 불어 대는 폭풍 속에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잠에 떨어진 사람과 같으리라. `남들이 나를 때려도 아프지 않네. 이토록 두들겨 맞았는데도 아무렇지 않네. 이번에 마신 술이 깨거든 또 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야지' 하면서 주절대기도 잘하는구나.”(현대어성경)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결국은 우리의 심령을 피폐케 만드는 것이 바로 중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물질이나 정신의 노예로 삼아 버리는 것이 바로 중독이라는 것이다.

중독의 근원인 가정

그렇다면 왜 그러한 중독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유전적 인자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근거가 없는 말이다. 결국은 가정이라는 환경, 부모라는 배경으로부터 학습되고 동화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욕구들을 특정한 대상에 못을 박아 버리는 그러한 집착들이 중독을 만들어 내는데 그러한 집착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결국은 가정이라는 배경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곧 ‘사랑’이 본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인 사랑이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문제가 영혼의 허전함이다. 그 허전함이 갈급함을 몰고 오고 그러한 영혼의 갈급함이 무엇인가에 집착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곧 인간의 발달단계 중에서 적절한 사랑의 공급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사랑을 대체하려는 욕구가 생기도록 되어 있다. 그 욕구는 즉시 발산되기도 하지만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성장한 후에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수유기때 엄마로부터 제대로 모유 수유를 받지 못했을 경우 단지 젖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엄마로부터의 피부 접촉이나 모유를 먹지 못함이 배고픔의 문제가 아닌 영적, 정신적 교류의 단절을 가져옴으로 인해 애정 결핍 현상까지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성인이 된 다음에도 어린 시절의 젖에 대치되는 뭔가를 찾게 되고 그것이 탐심으로 발전하게 되며 결국은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보고된 바 있지만 이를테면 음식을 탐하는 사람의 경우 비만이나 다른 질병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는 아주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심리적 요인이라는 점이다. 결국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중요한 확인 본능이 탐심으로 연결되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집착으로 발전하면서 중독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부모의 모든 삶의 모습이나 습관들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알코올 중독자의 가정에서 또다시 중독자가 양산되는 중요한 이유가 술을 쉽게 대하는 가정의 문화, 더불어 술에 대해 관대할 수밖에 없는 가족 구성원의 태도, 그리고 술로 인한 현실 도피 등의 현상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부터 술에 대한 로드 맵을 그리게 되고 그러한 부모의 알코올에 대한 Picture가 자녀의 심성에 내재되어 있다가 뭔가 영적, 정신적으로 허전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알코올 로드맵이 그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중독자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더불어 그렇게 뭔가에 집착하는 순간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결국 우상으로 변하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파괴되고야 마는 것이다.

중독의 원인부터 제거하라!

이러한 중독 현상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근본 원인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이미 나타난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물질이 소요된다. 그리고 그 효과도 아주 더디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근본적으로 중독 로드맵이 내재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결국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자녀교육을 그토록이나 강조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부모의 태도나 습관, 그리고 삶 자체가 자녀들의 평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래를 향한 가장 중요한 투자는 부모들을 교육시키는 일이다.

교회가 복지 차원에서 중독자들을 교화시키고 보살피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훨씬 예산을 적게 들이면서 장래에 나타날 중독자들을 미리 제거시키는 예방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모 교육이다. 여기서 부모교육이라 함은 가정 안에서의 올바른 부부생활,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모의 상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모와 부부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철저히 성경적 관점에서 교육하고 훈련하여야 함은 당연하다.

인본주의적, 세속적 부모 교육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해 나갈 것인가에 치중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들을 공부를 잘 시키고 좋은 대학 보낼 수 있을까에 관심이 높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둔다.

한마디로 관점이 다르다.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적 관점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있다. 그러니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교회가 가져야 할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지금 현실의 순간도 중요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눈이 있어야 하며, 그를 위해 미래를 위해 투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결국은 이 사회도 교회에 소망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하나님이다!

이 사회의 수많은 중독 현상들을 국가나 사회단체가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만약 그러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것은 대단히 순진하고도 천진난만한 생각일 뿐이다. 왜냐하면 결국 중독현상은 우상과의 철저한 영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본주의적 치료법이나 약물 요법으로는 치료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중독이다. 중독자의 마음에 뿌리 깊게 내재된 집착 그 자체를 털어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중독이다. 어쩌다가 술 자체를 못 마시게 강제함으로써 알코올 중독을 해결했다 하면 그 사람은 이제 또 다른 중독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 이른바 풍선 효과이다. 결국 그 근원이 해결되지 아니하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중독은 우상숭배와의 처절한 영적 전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 중독에서 헤어 날 수가 없다. 십자가의 능력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독자를 데려다 놓고 안수하고 축사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물방울이 바위덩어리에 떨어진다고 해서 곧바로 구멍이 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다보면 어느 샌가 그 바위 덩어리에 구멍이 패이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의 중독자 치유는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장기간에 걸쳐 행해져야 한다. 그러면서 예방 사역도 함께 해 나아가야 한다.

사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무책임한 말 중의 하나가 성령 충만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열심히 나오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 안에 다른 강력한 영적 존재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존재가 대체되지 않는 한 기도도 쉽지 않고 더더욱 성령 충만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결국 인내를 가지고 중독이라는 우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원하고 기도하며 후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담임목사가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 심령을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어린 시절의 양육 과정을 보면서 채워지지 못했던 그러한 부분들을 교회가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한 양육을 통해 비로소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더불어 주의할 것은 자주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도에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의지와 인내를 가지고 붙들어 주어야 하고 그 중독자를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중독자도 또 다시 용기를 가질 수가 있다.

내가 시무하는 웰빙교회에서는 이미 몇 명의 중독자들에 대한 치유사역을 행하고 있다. 불과 1년여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음을 본다. 여러 군데에서도 치료받지 못했던 그 중독자들이 서서히 호전되고 있으며, 정상적인 활동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 그 일을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할 수 있겠는가?

중독이 판을 치는 시대, 중독자가 만연해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사탄은 대단한 우상의 모형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공격하지 않고 보이지는 않는 어떠한 감정이나 너무 너무 유혹적인 어떠한 것으로 사람들을 포섭해 나아간다. 그 정체를 교회가 빨리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처해야 한다. 그것이 중독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다.

Posted by 분별없는 아이디어